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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3세9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재무상 윌리엄 에딩턴을 통해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즈음, 잉글랜드는 나바르의 국왕 악인왕(Charles the Bad) 샤를 2세를 우군으로 맞이하였다. 그는 나바르 왕국의 군주이면서, 노르망디에 여러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 인근에도 부유한 영지를 가지고 있어 오히려 에드워드 3세보다도 프랑스 왕위를 자격이 충분.. 2022. 6.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1350년대로 접어들면서 백년전쟁의 주인공은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에게로 넘어간다. 웨일즈의 왕자이자 '흑태자'로 유명한 우드스톡의 에드워드(Edward of Woodstock)는 영국사에서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며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마음이 잘 맞는 아들이었다. 반면, 역대 프랑스 국왕 가운데 가장 멍청한 왕으로 불린 '장 르봉(Jean le Bon)'은 1319년 생으로 '선량왕 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350~1355년까.. 2022. 5. 2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에드워드가 칼레를 점령한 것은 단지 크레시-칼레 전역을 획득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칼레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물자가 드나드는 항구이자 교두보였다. 또한 잉글랜드의 더비 백작은 필리프 6세의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에 의해 에귀용에서 포위되어 있었으나, 크레시 전투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노르망디 백작은 포위를 풀고 루아르강 북부로 이동하였다. 한편 필리프가 칼레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브르타뉴에서 전해온 잉글랜드군의 또 다른 승전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1347년 토머스 대그워스 경이 블루아의 샤를.. 2022. 4. 30.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3) 에드워드는 둔덕 위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서기들의 계곡(Valley of the Clerks)이 있었고, 전방과 우측에는 메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적군이 공격해올 전방은 경사진 초지로 이어져 궁수들이 활을 쏘기에 용이하였다. 그의 군대는 대략 2,000명의 중기병, 500명의 경창기병, 7,000명 정도의 궁수, 1,500명의 단검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료마다 수치를 각기 다르지만, 대략 1만 1,000명 정도인 셈이다. 잉글랜드 군은 병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에드워드 3세의 오른쪽에는 당시 16세였던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가.. 2022. 4. 15.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3) 에드워드와 함께 영국 해협을 넘어 노르망디로 향하는 잉글랜드 군대는 기사, 창기병, 궁수(기마 궁수와 보행 궁수) 및 단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당시 잉글랜드 중기병은 금속 고리가 연결된 형태의 '미늘 갑옷'과 원뿔형 투구, 팔꿈치 보호대와 발 보호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필리프 6세의 기사들은 어깨와 팔다리를 철판으로 보호하고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얼굴 장갑이 개폐형으로 되어 있는 헬멧(bascinet)을 착용하였다. 프랑스 기사의 판금 갑옷에 비하면 잉글랜드 군의 장갑은 확실히 구식이었다. 중기병 운용에는 막대한 비용과 물자가 요구되었는데, 중기병 한 기를 운용하기 해서는 무장한 시종 두 명과 세 마리의 말(전투용 군마, 장비 운반용 말, 비전투 시 승용마)이 필요했다. 세 마리의 말을 운용할.. 2022. 4. 6.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2) 슬라위스 해전이 끝난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 3세는 충분한 전쟁 자금을 마련해주지 못한 정부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였고, 그 주범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스트랫퍼드를 지목하였다. 스트랫퍼드는 국왕의 분노를 사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교묘한 정치 수완을 발휘해 극적으로 국왕과 화해의 길을 마련한다. 에드워드 입장에서도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려면 국내 유력자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1341년 의회에서 승인한 특별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만성적인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럽의 여러 가문과 잉글랜드의 금융업자 집단이 에드워드에서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파산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341년 4월 브르타뉴의 공작 장 3세(Jean III)가.. 2022. 4. 5.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1) 1340년 봄, 에드워드 국왕은 헨트(Gent)에서 돌아오자마자 의회를 소집하고 의회에 추가적인 세금을 요구했다. 의회는 증세에 불만을 들어내면서도 마지못해 2년 동안 '구일조세'(모든 농장에서 아홉째 곡식 단과 아홉째 양모와 양을, 모든 도시민의 재산에서 아홉째 것을 세금으로 거둠)에 동의했다. 에드워드 국왕은 필리프에 맞서기 위해 증원군을 모으고 그들을 실어갈 함대를 서퍽(Suffolk) 해안에 집결시켰다. 그는 헨트로 돌아가는 길에 슬라위스(Sluys)에서 프랑스 함대를 맞을 계획이었다. 이때 프랑스의 함대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이 함대에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맹방인 카스티야(Castilla)와 베테랑 선장 '바르바네라(Barbanera)'가 이끄는 제노바의 선박들도 포함되어.. 2022. 2. 8.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이전 편: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tistory.com)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프랑스 망명으로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교황 베네딕트 12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의 휴전을 잠시나마 성사시켰지만(1335년 11월), 에드워드 국왕과 필리프 국왕을 화해시킬 순 없었고, 함께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했던 이들의 약속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1336년 3월) 몇 주 후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되어 있던 프랑스 함대는 마르세유에서 노르망디의 항구로 이동하였다. 함대 자체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사략선들이 영국 해협과 비스케이만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잉글랜드의 전쟁 준비 프랑스 함대가 노르망디로 이동한 후, 노팅엄에 모인 대평의회(Gr.. 2022. 1. 15.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구입한 지 꽤 오래된 책인데, 이제야 제대로 읽어보기 시작한다. 이 책은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로부터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되어, 1453년 잉글랜드가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난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양국은 내내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양 측 모두 전쟁을 종식시킨 대전략이 없는 상태에서 전투와 휴전을 반복하였고, 그 사이에는 많은 약탈이 있었다. (참고로 '백년전쟁'이라는 표현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사용된 용어이다.) 잉글랜드는 장궁의 놀라운 위력으로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와 같은 전설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프랑스 대포에 의해 잉글랜드 궁수가 .. 2022.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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