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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전투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에드워드가 칼레를 점령한 것은 단지 크레시-칼레 전역을 획득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칼레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물자가 드나드는 항구이자 교두보였다. 또한 잉글랜드의 더비 백작은 필리프 6세의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에 의해 에귀용에서 포위되어 있었으나, 크레시 전투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노르망디 백작은 포위를 풀고 루아르강 북부로 이동하였다. 한편 필리프가 칼레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브르타뉴에서 전해온 잉글랜드군의 또 다른 승전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1347년 토머스 대그워스 경이 블루아의 샤를.. 2022. 4. 30.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3) 에드워드는 둔덕 위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서기들의 계곡(Valley of the Clerks)이 있었고, 전방과 우측에는 메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적군이 공격해올 전방은 경사진 초지로 이어져 궁수들이 활을 쏘기에 용이하였다. 그의 군대는 대략 2,000명의 중기병, 500명의 경창기병, 7,000명 정도의 궁수, 1,500명의 단검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료마다 수치를 각기 다르지만, 대략 1만 1,000명 정도인 셈이다. 잉글랜드 군은 병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에드워드 3세의 오른쪽에는 당시 16세였던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가.. 2022.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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