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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by The Raven 2022. 1. 3.

백년전쟁 1337~1453. 구입한 지 꽤 오래된 책인데, 이제야 제대로 읽어보기 시작한다.

이 책은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로부터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되어, 1453년 잉글랜드가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난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양국은 내내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양 측 모두 전쟁을 종식시킨 대전략이 없는 상태에서 전투와 휴전을 반복하였고, 그 사이에는 많은 약탈이 있었다.

(참고로 '백년전쟁'이라는 표현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사용된 용어이다.) 

잉글랜드는 장궁의 놀라운 위력으로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와 같은 전설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프랑스 대포에 의해 잉글랜드 궁수가 궤멸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읽기 쉬운 이야기체로 백년전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백년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크게 바꾼 연구들도 활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전쟁의 서막 1328년 ~ 1340년

1328년 프랑스.

프랑스 카페(Capet) 왕조의 마지막 혈통인 샤를 4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가 왕이 될 것이지만, 딸을 낳으면 왕관은 발루아의 필리프에게 가야 한다.

 

앙주(Anjou)와 멘(Maine), 그리고 발루아(Valois)의 백작 필리프는 당시 서른다섯 살로 샤를 4세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샤를 4세가 세상을 떠난 후 왕비는 1328년 만우절에 유복녀를 낳았다. 

필리프는 즉시 파리에서 의회를 소집하였고, 의회는 재빨리 그를 프랑스의 국왕 즉 필리프 6세(Philippe VI de Valois)로 인정하였다.  

샤를 4세(좌)와 필리프 6세(우)

2년 뒤인 1330년 잉글랜드.

당시 잉글랜드의 왕은 에드워드 3세(Edward III)였지만, 실질적 통치자는 그의 어머니인 모후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연인 로저 모티머 백작과 노팅엄 성에 거처를 잡고 있었다. 

18세의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어느 날 젊은 귀족 무리를 이끌고 비밀 통로를 통해 성채로 잠입한다. 

근위병을 제압한 후 이사벨의 침실로 난입한 에드워드는 그 자리에서 모티머를 사로 잡았다. 

이사벨은 모티머를 선처해 줄 것을 애원했지만, 로저는 교수대에 목 매달린 뒤 말 네 마리가 잡아당기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드디어 젋은 국왕이 섭정에서 벗어사 왕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왼쪽부터 에드워드 2세, 이사벨,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가 모티머와 어머니를 증오할 이유는 충분했다. '프랑스의 암이리'란 별명을 가진 모후는 남편 에드워드 2세를 늘 멸시해 왔다. 

배넉번 전투(Battle of Bannockburn)에서 패한 에드워드 2세(Edward II)는 무능력한 통치자였으며,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1326년 이사벨과 모티머는 에드워드 2세에게 퇴위를 강요했고, 아들(에드워드 3세)을 허수아비 군주로 세웠다. 1년 뒤, 폐위된 왕은 불에 달군 부지깽이에 항문을 찔린 채 끔살 당한다...

이후, 모티머는 에드워드 2세의 동생인 켄트 백작을 음모에 빠뜨려 살해하고 심지어 모후까지 임신시킨다.

그런데 사실 이사벨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의 연결 고리였다. 

그녀는 필리프 6세와 사촌 지간이면서 선왕 샤를 4세의 누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샤를 4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발루아 가문(필리프 6세)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영국 왕가 가계도 (※가계도 위의 양국 지도는 당시 양국의 영토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이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시에 국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에드워드는 당시 기옌(Guyenne) 공작이자 퐁티외(Ponthieu) 백작으로 프랑스의 열두 귀족 가운데 한 명이자 프랑스 내 거물 귀족이었다. 

샤를 4세 서거 후, 필리프가 소집한 의회가 파리에서 열리고 있을 때, 잉글랜드의 사절단이 의회를 찾아왔고 그들은 이사벨에게 프랑스 왕위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의회는 살리카법(Lex Salica, Salic Law)을 이유로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였다. 아래는 잉글랜드 사절단의 왕위 요구를 거절한 프랑스 의회의 주장이다. 

프랑스 왕국은 너무도 존귀하므로 계승에 의하여 여성의 수중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사실 당시 잉글랜드의 국력은 프랑스에 비벼볼 레벨이 아니었고, 에드워드 3세는 1259년 이래로 잉글랜드 국왕들이 프랑스 국왕의 가신 자격으로 보유한 기옌만 유지해도 만족하는 입장이었다.

왼쪽 가운데 Guyenne이라고 적힌 분홍색 부분이 기옌 땅

기옌은 잉글랜드 왕에게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기옌의 세수는 잉글랜드 전체 세수보다도 컸고, 기옌 공국의 수도 보르도는 잉글랜드와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플랜태저넷 가문은 자신들의 영지 중 기옌을 웨일스나 아일랜드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당시 잉글랜드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체급이 달랐다.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약 2,100만 명 추정되어 잉글랜드의 5배에 달했으며 당시 인구 15만의 파리는 유럽의 중심이었다.

반면, 잉글랜드는 경작지보다 숲과 황야가 많은 척박한 땅이었고, 이 나라의 주요 자산은 양모였다. 

정치적으로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는데 에드워드 3세는 항상 100여 명의 봉건 영주, 주교, 수도원장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반면, 프랑스의 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능가하는 존재로 교황의 보호자이면서, 백작과 봉신들을 꾸준히 굴복시켜왔다.

두 국왕 모두 처음에는 기옌과 관련한 이슈에 대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마음이 있었지만, 두 나라의 중앙 집권화와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기옌간의 전통적인 봉건 관계와 상충되는 일은 늘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334년 5월, 당시 열 살이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내 친 잉글랜드파와 에드워드 3세에 쫓기다 필리프 6세의 권유로 프랑스로 망명하는 일이 발생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고조되는 갈등은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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