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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1)

by The Raven 2022. 2. 8.

1340년 봄, 에드워드 국왕은 헨트(Gent)에서 돌아오자마자 의회를 소집하고 의회에 추가적인 세금을 요구했다. 

의회는 증세에 불만을 들어내면서도 마지못해 2년 동안 '구일조세'(모든 농장에서 아홉째 곡식 단과 아홉째 양모와 양을, 모든 도시민의 재산에서 아홉째 것을 세금으로 거둠)에 동의했다.

에드워드 국왕은 필리프에 맞서기 위해 증원군을 모으고 그들을 실어갈 함대를 서퍽(Suffolk) 해안에 집결시켰다. 그는 헨트로 돌아가는 길에 슬라위스(Sluys)에서 프랑스 함대를 맞을 계획이었다.

구글 어스에서 찾아본 서퍽(오웰강)과 슬라위스 위치

이때 프랑스의 함대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이 함대에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맹방인 카스티야(Castilla)와 베테랑 선장 '바르바네라(Barbanera)'가 이끄는 제노바의 선박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340년 6월 22일 에드워드 3세는 대형 코그선 토머스호에 승선하였고, 잉글랜드 함대는 서퍽의 자그마한 오웰 포구에서 출항하였다. 중간에 북함대(Northen Fleet) 제독 몰리 경이  지휘하는 50척의 배가 합류하여 잉글랜드 함대는 147척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은 코그선이었는데, 코그선은 기본적으로 양모, 포도주, 또는 승객을 실어 나르는 데 주로 사용되었던 일종의 상선이었다. 

현대에 복원된 코그선 (출처 - 위키백과)

이 배는 작은 만이나 강어귀를 드나드는 용도의 작은 배들로 병력 운반에는 적합했지만, 전함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리고 사각 돛 한 개와 원시적인 방향타만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투용으로 건조된 전함과 탁 트인 바다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3일 잉글랜드 함대는 제일란트(Zeeland) 앞바다에 정박했고, 프랑스 함대는 슬라위스에 집결해 있었다.

제노바의 바르바네라 선장은 잉글랜드 코그선 함대에 대응해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 바다로 나가자고 프랑스 함대 제독에게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프랑스는 함대를 셋으로 나누어 배치했는데, 배들은 사슬로 묶여 있었다(연환계??). 프랑스 함대의 병력은 확실히 대규모였지만, 함대에 승선한 대부분은 강제 징발된 자들로 전투 경험이 없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함대를 세 전대로 나누었다. 중앙에 위치한 전대에는 중기병을 태우고 그 좌우로 궁수를 태운 두 전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네 번째 전대는 예비로 남겨두었다. 

아침 다섯 시, 정박지를 빠져나온 잉글랜드 함대는 조수가 바뀌길 기다렸다가 조수가 바뀌는 시점에 순풍을 타며 프랑스 함대로 접근했다. 

정박해 있는 프랑스 함대(파란색)로 접근하는 잉글랜드 함대(붉은색)

해를 등지고 순풍을 받으며 조수를 타고오는 잉글랜드 함대를 보며 제노바의 바르바네라는 즉시 프랑스 함대 제독에게 배를 끌고 바다로 나갈 것을 간청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제독 베위셰(Béhuchet)는 이를 무시하였고, 제노바 갤리선들은 닻을 풀고 스스로 빠져나왔다.

오전 아홉시, 잉글랜드 함대는 여전히 정박지에 틀어박혀있는 프랑스 함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먼저 석궁과 장궁 세례를 퍼부은 잉글랜드 군은 바로 프랑스 배들과 충돌하여 배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뒤이어 칼과 도끼 단창으로 무장한 잉글랜드 중기병들이 프랑스 배로 난입하였고 궁수들은 계속해서 화살을 날리고 선원들은 돌이나 쇠 화살, 생석회 등을 던졌다. 심지어 수면 아래 선체에 구멍을 내어 적선을 침몰시키려는 잠수부도 있었다. 

제노바 석궁 사수가 한 발을 쏠 때, 두 발 심지어 세 발까지 화살을 쏜 장궁병들과 적선으로 맹렬히 뛰어든 중기병들의 활약으로 프랑스 제1전대는 완전히 제압되었다. 프랑스 함대 제독 키에레(Quiéret)는 항복 즉시 참수되었고, 다른 프랑스 함대 제독 베위셰도 붙잡혀 잉글랜드 기사들의 손에 교수형을 당했다. 

프랑스 제독의 시신이 에드워드 국왕의 기함 토머스 함에 매달린 모습을 본 프랑스 제2전대는 공황 상태가 빠졌다. 2전대의 많은 선원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바닷물로 뛰어들었고, 전장은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되었다.

프랑스 제2전대에 소속되었고 디에프인들로 구성된 생자크호는 마지막까지도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헌팅던 백작이 생자크호를 접수했을 때는 배 위에 400구의 시신이 널려있었다. 

이렇게 슬라위스 해전은 잉글랜드의 완승으로 끝났다. 프랑스 함대는 대부분 나포되거나 침몰되었고, 수천 명의 병사와 선원들도 함께 죽었다. 에드워드 국왕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6실링 8펜스짜리 노블 금화를 찍었다. 

하지만, 슬라위스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했고, 2년 뒤 프랑스는 영국의 플리머스를 두 번째로 약탈한다. 에드워드는 프랑스 정복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1340년 7월이 끝날 무렵, 에드워드 국왕은 백작 일곱 명, 궁수 9,000명, 수 천명의 플랑드르 장창병 및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투르네(Tournai)를 포위하였다. 

투르네의 위치 (구글 맵)

하지만, 이들에겐 투석기, 공성퇴와 같은 공성 기구가 없었고, 성을 포위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고용 계약으로 합류했던 네덜란드, 독일 귀족들은 보수가 제때 안 나온다는 이유로 전장을 떠나기 일쑤였다.

한편, 필리프는 투르네 포위를 풀기 위해 중기병만 2만에 달하는 대부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다만, 잉글랜드 군대와 전면적으로 싸우기보다는 이들의 전초 기지를 습격하고 보급로에 매복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잉글랜드 군의 보급은 바닥나기 시작했고, 용병들에게 급료도 지급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에드워드 국왕은 더 이상 전투를 진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본토에서는 백성들은 구일조세 납부를 거부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 징세인이 무장한 저항 세력과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에드워드는 결국 채권자들을 피해 몰래 저지대 지방으로 도망쳤다가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슬라위스 해전은 여기까지... 

※ 본 포스트는 '백년전쟁 1337~1453'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이 책은 (비전공 일반인 기준으로) 백년전쟁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어 직접 읽어보시기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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