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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by The Raven 2022. 1. 15.

이전 편: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tistory.com)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프랑스 망명으로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교황 베네딕트 12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의 휴전을 잠시나마 성사시켰지만(1335년 11월), 에드워드 국왕과 필리프 국왕을 화해시킬 순 없었고, 함께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했던 이들의 약속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1336년 3월)

몇 주 후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되어 있던 프랑스 함대는 마르세유에서 노르망디의 항구로 이동하였다. 함대 자체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사략선들이 영국 해협과 비스케이만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잉글랜드의 전쟁 준비

프랑스 함대가 노르망디로 이동한 후, 노팅엄에 모인 대평의회(Great Council)는 프랑스 국왕을 규탄하고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 맞서 싸울 수 있게 '십일조'와 '십오일조' 특별세를 걷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이후 3년 더 갱신된다.)

에드워드 3세는 호화로운 궁정, 정기적으로 열리던 연회와 마상 창시합을 통해 뛰어난 참모들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태생과 계급에 관계없이 군 지휘관들을 등용하였는데, 그 중에는 더비셔(Derbyshire) 출신의 가난한 기사 존 챈도스 경(Sir John Chandos), 노퍽(Norfolk)의 소지주 가문 출신의 토머스 대그워스 경(Sir Thomas Dagworth), 역시나 미천한 가문 출신의 월터 매니 경(Sir Walter Manny)이 있었으며, 프랑스에서 넘어온 '아르투아의 로베르(Robert of Artois)'도 있었다. 

존 챈도스 경(좌), 토마스 대그워스 경의 문장(가운데), 월터 매니 경의 문장(우)

에드워드 3세의 왕비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도 저지대 지방(Low Countries, 현대의 벨기에, 네덜란드, 북프랑스 일부 지역을 일컫음)과 연줄이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에노의 필리파 (장 프루아사르 연대기)

그녀는 1328년에 에드워드와 결혼했고, 2년 뒤 훗날 '흑태자(Black Prince)'라 불리는 첫 아들을 포함하여 많은 아들을 왕에게 안겼다.  

유럽의 저지대 국가들 (참고로 위의 지도는 1500~1600년대 지도이다)

1336년 에드워드는 저지대 지방의 신성로마제국 귀족들에게 사절단을 보내고 거금을 들어 이들을 포섭하는 한편, 양모에 의존하는 플랑드르 지역에는 양모 수출을 금지시켜 이 지역을 압박하였다. 이후 1339년 12월, 에드워드는 플랑드르 지역의 장창병 군대와 군사 동맹을 맺은 후 양모 수출을 허락한다.  

에드워드는 전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양모 무역 독점권을 대가로 일부 부유한 잉글랜드 상인들과도 거래를 하였고, 잉글랜드 양모나 기옌 포도주에 부과하는 관세를 담보 삼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은행가와 네덜란드 상인, 잉글랜드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빌렸다.

에드워드가 겪었던 또 다른 어려움은 군대 동원에 있었다. 당시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는 '고용 계약(indenture)'을 통해 군 지휘관을 고용하고, 군사적 경험이 있는 징병관이 해당 지역의 16세~60세 주민중 적합한 남성을 징병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징병된 이들 중에는 다수의 범법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사면장"을 기대하며 군에 가담한 사형수들도 있었다. 에드워드는 이들에게도 급여를 주고 무장시켜야 했다.

프랑스의 전쟁 준비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비해 훨씬 부유했지만, 필리프 6세가 프랑스의 부를 이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잉글랜드와 달리 프랑스에는 단일한 과세 체계도, 자문 협의회도 없었다. 지방의 협의회는 국왕이 원하는 만큼 돈을 지불하지 않거나 아예 조금도 지불하지 않으려 했다. 프랑스 국왕은 어쩔수 없이 이들에게 각종 특권과 면세를 조건으로 재정을 마련해야 했다.

영주가 국왕으로부터 봉토를 하사 받고 군역을 제공하는 과거의 봉건제도는 12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점차 해체되고 있었고, 전쟁에 나가는 귀족과 병사들은 참전에 따른 보수를 받기를 원했다. 그래도 필리프 6세는 그럭저럭 군대를 마련하여, 1340년에는 기옌 국경지대에 2만에 가까운 중기병, 플랑드르 국경 지대에는 4만 명이 넘는 중기병을 배치했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 둘은 각자 어떻게든 국가의 자원을 뽑아내기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힘겹게 느릿느릿 전쟁에 돌입하였다.
 

전쟁의 시작

1337년 5월 24일, 필리프 국왕은 (에드워드가 프랑스에서 도망친 로베르를 받아준 것을 거론하며)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와 짐에게 거역하고 불충을 저질렀기에" 에드워드로부터 기옌을 몰수한다고 선언한다.

같은 해 10월, 에드워드 3세도 "프랑스 국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필리프"에게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공식 서한을 보내면서 응수한다. 

백년전쟁 초기 양국 영토 상황

필리프 6세는 즉시 기옌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 공세는 3년간 이어진다. 프랑스의 공세로 1339년 지롱드(Gironde)강 하구 북안의 블라예(Blaye)를 점령되었고, 1340년에는 도르도뉴(Dordogne)강 어귀의 부르(Bourg)가 프랑스에 넘어갔다. 

이후 가론(Garonne)강 유역의 라레올(La Réole)과 기옌 공국의 수도와 가까운 생 마케르(Saint-Macaire)가 포위되었다. 기옌은 1340년 이후 필리프가 다른 일로 이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한 덕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9번이 블라예, 10번이 부르, 29번이 생-마케르 지역, 붉은 사각형이 보르도 (참고로 위의 지도는 현대 프랑스의 와인 산지)

한편, 1337년 8월 에드워드는 막대한 뇌물을 이용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필리파의 인척인 루트비히 4세(Louis IV)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루트비히 4세는 7년 동안 잉글랜드를 원조하기 약속하고 에드워드를 모든 제국 영지에 관할권을 행사하는 제국 총대리로 임명했다. 에드워드와 필리파는 이 외교적 성과를 즐기며 안트베르펜(Antwerpen)에 머무는 사이 잉글랜드는 프랑스 사략선의 습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1338년 3월, 프랑스의 공격에 포츠머스(Portsmouth)가 쑥대밭이 되었고, 에드워드의 전쟁 경비가 실린 선박들도 나포되었다. 이듬해 프랑스는 도버와 포크스톤을 공격했고 템스강 하구에 출현하기도 했고, 사우햄프턴과 보르도 사이를 오가는 포도주 선단에도 위협이 되었다. 

잉글랜드도 반격하여 1339년 르트레포르(Le Treport)를 약탈하고 불로뉴 항구의 프랑스 선박을 30척 불태웠지만, 프랑스의 함대 규모는 계속 커졌다. 

1339년 9월 에드워드는 마침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저지대 지방에서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이 군대는 안트베르펜에서 합류한 소규모의 잉글랜드 군대와 독일, 네덜란드 용병, 그리고 브라방 공작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군대는 티에라슈(Thiérache) 교외를 파괴하고 캉브레(Cambrai)를 포위하면서 피카르디(Picardie)로 진군하였다. 이에 맞서 필리프 6세는 생캉탱(Saint-Quentin)에서 3만 5000명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왔다.

필리프의 공격을 기다리면서 에드워드 국왕은 군대를 3열로 배치하였다. 전위에는 잉글랜드 병사들이 배치되었고, 그 뒤에는 독일 제후의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가장 후위에는 브라방 공작 휘하 병사들과 플랑드르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필리프는 에드워드보다 병력이 두 배나 많았지만, 전혀 공격하려 하지 않았고, 양측 기사들끼리 결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곧 이를 철회하였다. 결국 별다른 성과없이 잉글랜드 군은 철군했는데, 대신 프랑스 군대가 없는 프랑스 시골 및 도시가 잉글랜드군의 주 표적이 되었다. 병사들은 집집마다 들어가 약탈한 뒤 불을 놓았고, 수도원, 교회 등도 약탈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수백 명의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고, 굶어 죽어가는 수천 명은 인근의 요새화된 도시로 도망쳤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의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해 이 고약한 습관을 얻었고, 이러한 작전을 통해 프랑스인들이 전쟁에 지치도록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로 떠나기 전 1340년 2월 6일 헨트(Gent)에서 성대한 회의를 열고 자신을 프랑스 국왕이라 칭했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에게 결투를 제안했다. 결투는 두 왕이 대결(참고로 당시 필리프는 47세, 에드워드는 28살이었다.)하거나 양 국에서 각각 뽑힌 기사 100명이 서로 대결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제안을 통해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결의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판단 능력을 보여주었다. 

반면 중세 기준으로 노년에 접어들고 있던 필리프 6세는 전적으로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적의 전쟁 자금이 바닥날때까지 전투를 회피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1장. 전쟁의 서막은 여기까지... 다음은 크레시 전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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