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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by The Raven 2022.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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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3)

크레시 전투 삽화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서)

에드워드는 둔덕 위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서기들의 계곡(Valley of the Clerks)이 있었고, 전방과 우측에는 메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적군이 공격해올 전방은 경사진 초지로 이어져 궁수들이 활을 쏘기에 용이하였다. 

그의 군대는 대략 2,000명의 중기병, 500명의 경창기병, 7,000명 정도의 궁수, 1,500명의 단검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료마다 수치를 각기 다르지만, 대략 1만 1,000명 정도인 셈이다. 

잉글랜드 군은 병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에드워드 3세의 오른쪽에는 당시 16세였던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가 지휘하는 4,000명의 부대가 배치되었다. 이 분대의 중앙에는 말에서 내린 800명의 중기병이 길게 늘어섰고 중기병의 양 측면에는 2,000명의 궁수가 배치되어 프랑스 군이 중앙으로 돌격해볼 때 측면에서 화살을 날릴 수 있도록 하였다. 궁수들의 뒤에는 단검병들이 배치되었다.

에드워드의 좌측에는 노샘프턴 백작과 애런든 백작이 지휘하는 두 번째 분대가 위치하였다. 이 분대 역시 중앙에는 말에서 내린 500명의 중기병이 자리 잡고 있었고 좌우로 궁수들이 배치되었다. 세 번째 분대는 에드워드 3세 본인이 직접 지휘하였으며 말에서 내린 700명의 중기병, 2,000명의 궁수 및 단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예비 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뒤쪽에 배치되었다.  

에드워드는 부대 배치를 마치고 병사들의 사이를 북돋은 뒤 전장을 한눈에 보기 위해 고지의 풍차에 사령부를 세웠다. 정오에 프랑스 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도착했고, 그는 나팔을 울려 병사들이 집결하도록 했다. 

크레시 전투 전장도

1326년 8월 26일 토요일

필리프의 군대가 크레시로 향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규모는 중기병 2만 명을 포함해 최소 3만 명으로 필리프는 이 전투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프는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정찰을 보냈는데, 잉글랜드군의 배치를 확인한 '르무안 드 바제유'라는 기사는 잉글랜드 군이 철저하게 전투 대형을 갖춘 채 프랑스 군을 기다라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오늘 밤은 군사들과 휴식을 취하고 내일 전투가 나서자고 간언 하였다. 

필리프는 그의 조언에 대해 생각해본 뒤, 병사들에게 멈춰서 진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 거대한 규모의 군대는 필리프의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방의 중기병들이 멈추려고 해도 후방의 병력이 계속 밀고 들어오는 탓에 흐트러진 전열로 잉글랜드 진영에 접근하고 있었다. 크레시로 향하는 길은 잉글랜드 군을 무찌르자고 외치는 농민과 주민들로 혼잡하였고,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필리프는 절박한 심정으로 명령하였다. 

제노바 병사들이 선두에 서서 전투를 개시하라. 신과 성 드니의 이름으로!


이 때는 저녁이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나팔과 북이 울리면서 일렬로 늘어선 제노바 석궁수들이 잉글랜드 진영 140~180미터까지 접근하였다. 이들이 쿼럴(짧은 석궁용 화살)을 쏘기 시작하자 잉글랜드 궁수들도 활을 쏘기 시작하였다. 제노바 석궁수들은 먼 길을 행군하느라 피곤한 상태였고, 석궁을 재장전하는 동안 자신들을 보호할 패비스(pavise)를 버리고 온 병사도 있었을 것이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쏜 화살비에 석궁수들은 쓰러지기 시작했고, 생존한 자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패비스 (출처: 위키백과)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단 알랑송 백작은 (그가 보기에) 너무나 비겁한 석궁수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이들을 짓밟으라고 지시하였다. 그의 명령에 중기병들은 무질서한 돌격을 감행하였다. 중기병들의 말굽에 짓밟힌 석궁수들의 비참한 비명소리가 후방에 있던 프랑스 군의 귀에 들어왔고 흥분한 병사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혼잡하게 전진하는 프랑스군과 그들의 말을 향해 잉글랜드 궁수들은 화살을 날렸다. 빗발치는 화살에 프랑스군 진영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와중에 일부 프랑스 기사들이 잉글랜드군의 대열 앞까지 도달하였으나 곧바로 잉글랜드 중기병들의 도끼와 검에 도륙되었다. 

앞을 못 보는 보헤미아의 요한 국왕(John the Blind)도 잉글랜드 진영까지 도달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수행 기사들과 고삐를 서로 연결하여 간신히 잉글랜드 진영까지 도달했으나 잉글랜드 중기병들의 손에 쓰러졌다. 이들의 시신은 다음날 발견되었는데, 흑태자는 이들에 깊은 감명을 받아 보헤미나 국왕의 문장과 좌우명 (깃털 세 가닥과 '나는 섬긴다(Ich dien)')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전사한 보헤미아 국왕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 흑태자

프랑스 병사들은 이날 새벽 세 시까지 열다섯 차례나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매번 빗발치는 화살 세례 속에 아수라장으로 끝났다. 웨일스와 콘월의 단검병들은 바닥에 쓰러진 프랑스 병사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베고 죽였다. 

필리프 국왕은 목에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려 했지만, 그의 주변에는 60명의 중기병뿐이었다. 결국 에노 백작이 그를 간신히 설득하여 필리프는 크레시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라브루아의 궁성으로 말을 달렸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자신들의 전과가 얼마나 큰지 모른 채 각자의 위치에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크레시 지역엔 짙은 안개가 깔렸다. 에드워드는 일체의 추격을 금지하고, 노샘프턴 백작에게 정찰대를 주어 내보냈다. 중기병 500명, 궁수 2,000명으로 구성된 정찰대는 주변을 살피다 현지 민병대 일부와 뒤늦게 도착한 노르망디 기사들을 패주 시켰다. 

전투가 끝난 다음 날이 되어서야 잉글랜드 군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이 죽인 귀족과 기사들의 시신은 1,500구가 넘었다. 프랑스의 '평민' 전사자 수는 1만 명이 족히 넘었다. 이 전투에서 에드워드는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고, 기독교권에서 가장 유명한 지휘관이 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승리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병사들은 지쳤고 이 상태론 파리로 진군할 수 없었다. 8월 30일, 그는 항구 한 군데를 얻기 위해 해안으로 출발하여 9월 4일 칼레에 도착했다. 칼레는 플랑드르 국경선과 매우 가까웠고 잉글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다. 

에드워드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칼레를 접수할 거라 생각했지만, 칼레의 방비는 매우 강력했다. 부르고뉴 기사 장 비엔의 수비대는 결연히 도시를 지키고 있었고, 잉글랜드 군이 물러날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역시 칼레를 손에 넣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여 병사들에게 나무 움막을 지어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많은 잉글랜드 병사들이 병으로 죽었지만, 살아남은 나머지가 인근 50킬로미터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칼레 포위를 이어갔다. 잉글랜드 군은 의회의 협조를 받았고 1347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칼레 주변에 3만 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시켰다. 증원병뿐만 아니라 이들이 먹을 식량까지 해협을 건너 조달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행정적 위업이었다. 또한 잉글랜드 군은 철저한 해상 봉쇄로 칼레 수비대로 오는 물자 보급을 막았다.

1347년 7월 필리프는 마침내 칼레 구원을 위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예전만큼 많지 않았고 사기도 낮았다.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나와서 싸우자는 도전장을 보냈지만, 에드워드는 칼레의 포위를 풀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또 한 번 싸웠다간 크레시 전투의 악몽이 다시 반복할 거라 생각한 프랑스군은 결국 8월 2일 퇴각하였다. 퇴각하는 프랑스 군을 보며 칼레 수비대는 절망하였다.

프랑스 군이 떠난 다음날  칼레 수비대의 장 드 비엔은 잉글랜드 군과 협상하겠다고 나섰다. 에드워드는 칼레 시의 저항에 몹시 분노했지만, 결국 주변의 간언에 설득되어 도시에 대한 처벌을 여섯 명의 고위 시민들로 제한하였다. 

'칼레의 시민' - 오귀스트 로댕 작

국왕은 목에 고삐를 건채 끌려온 이들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으나 임신한 필리파 왕비의 간청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만 칼레에 있던 주민들은 모두 추방되었고 주민들이 떠난 칼레시의 재산은 잉글랜드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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