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가 칼레를 점령한 것은 단지 크레시-칼레 전역을 획득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칼레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물자가 드나드는 항구이자 교두보였다.
또한 잉글랜드의 더비 백작은 필리프 6세의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에 의해 에귀용에서 포위되어 있었으나, 크레시 전투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노르망디 백작은 포위를 풀고 루아르강 북부로 이동하였다.
한편 필리프가 칼레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브르타뉴에서 전해온 잉글랜드군의 또 다른 승전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1347년 토머스 대그워스 경이 블루아의 샤를 군대를 전멸시켰다. 샤를은 생포되어 잉글랜드로 보내졌고, 스코틀랜드 국왕처럼 런던탑에 갇혔다.
교황청은 잉글랜드 군이 저지른 참상에 개탄하며 잉글랜드 국왕에게 항의하였다. 교황의 중재로 1347년 9월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휴전에 합의하였다. 필리프 6세는 매우 절박한 처지였다. 그의 군대를 궤멸되었고, 국고는 바닥이 났다. 그는 그 해 11월 파리에서 열린 삼부회 앞에서 몸을 낮췄다. 하지만, 삼부회는 필리프 왕의 실책을 비판하면서 단 한 푼도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
필리프의 관리들은 지방 의회와 성직자들로부터 약간의 돈을 힘들게 받아 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굴욕을 겪으면서도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를 침공할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반면 에드워드 3세는 고국에서 백성들과 의회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1348년 6월 에드워드 3세는 가터 기사단을 창설했는데, 이 기사단은 그로부터 몇 년 전 결성된 기사들의 단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에드워드는 솔즈베리 백작부인이 춤을 추다 가터를 떨어트린 민망한 상황을 모면해주기 위해
"나쁜 생각을 품는 자야말로 부끄러워하라(Honi soit mal y pense)"
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릎에 가터를 묶었는데 이 것이 바로 가터 훈장의 모토이다.
1350년 에드워드는 한 번의 승리를 더 거두었다. 플랑드르 백작은 카스티야 인들에게 슬라위스에서 함대를 집결시키는 것을 허락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카스티야 인들의 활동으로 인해 잉글랜드의 상선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8월 에드워드는 셋째 아들 곤트의 존(당시 10살)을 대동하고 카스티야인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40척으로 이루어진 카스티야 함대는 카스티야 왕가의 돈 카를로스 데 라세르다(Don Carlos de la Cerda) 왕자가 지휘하고 있었다.
레에스 파뇰쉬르메르 (Les-Espagnols-sur-Mer)로 알려진 이 전투는 슬라위스 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막상막하의 접전이었다. 카스티야 인들은 투석기와 거대한 석궁,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고 바람의 방향도 그들에게 유리하였다.
에드워드와 존이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고 적군에게 거의 붙잡힐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잉글랜드 함대는 카스티야 갤리선을 열네 척 이상 포획하며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이 프랑스는 잉글랜드보다 훨씬 더 큰 재앙에 직면하고 있었다. 흑사병(선페스트)이 마르세유에서 발병하여 1348년과 1349년에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다. 어느 연대기 작가에 의하면 파리 한 곳에서만 흑사병으로 인해 8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프랑스가 지은 죄로 인해 페스트가 번졌다고 믿은 프랑스 국왕은 신성모독적인 언사를 금지하는 특이한 위생 주의령을 내렸다. 이 칙령을 처음 위반했을 때는 한쪽 입술을, 두 번째 위반 시에는 다른 입술을, 세 번째 위반했을 때에는 혀를 잘랐다.
역병은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도 전파되었다. 1348년 8월 도싯에서 처음 창궐한 역병은 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나가 1349년까지 창궐하였다. 전체 인구의 약 1/3이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주인을 잃은 땅은 버려지고 지대는 감소되거나 미납되면서 국가의 세수가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페스트로 양국은 모두 군사 작전의 준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350년 8월 22일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생드니 수도원의 거대한 제단 왼쪽에 묻혔다. 내장은 파리 자코뱅 수도원에 매장되었고, 심장은 발루아의 부르주퐁텐에 있는 카르투시오 수녀원에 묻혔다.
필리프 6세는 형편없는 실패자로 역사에 남았다. 크레시 전투에서 무참히 패했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너무 많은 특권을 남발하는 바람에 프랑스 군주제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거의 작동 불가능했던 재정 체계를 극복하여 전장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했으며 지방 의회와의 협상을 통해 잉글랜드의 위협을 납득시켰다.
필리프 6세는 칼레를 상실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남기고 떠났다. 1349년 그는 마요르카 국왕으로부터 몽펠리에 시를 사들였고, 같은 해 손자(샤를 5세)의 이름으로 알봉 가문의 영지(일명 '도피네' 지방)를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협상으로 프랑스의 국경이 마침내 알프스 산맥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왕 중 하나로 뽑히는 이 손자는 사실 필리프 6세의 정책들을 상당수 따른 것이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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