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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by The Raven 2022. 5. 2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1350년대로 접어들면서 백년전쟁의 주인공은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에게로 넘어간다. 웨일즈의 왕자이자 '흑태자'로 유명한 우드스톡의 에드워드(Edward of Woodstock)는 영국사에서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며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마음이 잘 맞는 아들이었다.

장 르봉

반면, 역대 프랑스 국왕 가운데 가장 멍청한 왕으로 불린 '장 르봉(Jean le Bon)'은 1319년 생으로 '선량왕 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350~1355년까지는 양 국 간의 대규모의 전투는 없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브르타뉴 지방에서 끊임없는 습격을 이어갔다. 1352년 잉글랜드 국왕의 대리 사령관인 토머스 대그워스 경이 매복에 걸려 살해당했지만, 그 후임인 월터 벤틀리 경은 같은 해 모롱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기 브르타뉴에서는 '30인의 결투(Combat of the Thirty')라는 유명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351년 플뢰르멜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로베르 드 보마누아르가 이끄는 프랑스 군의 공격은 받았다. 이때 잉글랜드 수비 대장이었던 리처드 뱀버러는 양 쪽에서 30명의 중기병이 나와 플뢰르멜 앞의 벌판에서 결투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30인의 결투를 묘사한 그림. Octave Penguilly L'Haridon작

말에서 내린 이들은 프랑스 측 기사 네 명, 잉글랜드 측 기사 두 명이 죽고 모두 녹초가 될 때까지 싸웠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단단히 대형을 형성한 잉글랜드 기사단을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프랑스 기사 한 명이 마침내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군마에 올라탄 후 돌진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뱀버러를 비롯한 기사 아홉 명이 죽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

브르타뉴에서 벌어지는 잉글랜드 군의 습격 활동(?)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잉글랜드 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잉글랜드 군이 현지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방법은 다양했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었던 방법은 포로의 몸값을 받는 것이었다. 제후나 대귀족은 어마어마한 가격의 몸값을 받아낼 수 있었고 이러한 거물이 아니더라도 부유한 도시민, 성직자, 심지어 소상인이나 농부에게도 저마다의 몸값이 책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몸값 사업은 잉글랜드의 상류층 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들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사업에는 잉글랜드의 국왕도 참여했는데, 그는 값나가는 포로를 저렴한 값에 사서 비싼 값을 받아내는 중개인으로 활동하였다. 1347년 토머스 대그워스 경은 블루아의 샤를을 에드워드에게 금화 2만 5,000 크라운(약 5,000 파운드)에 팔았고, 에드워드는 커다란 이익을 남겼다. 칼레는 이러한 포로 무역의 중심지였다.

브르타뉴의 수비대들은 더 악랼한 사업도 진행하였는데 바로 파티스(patis) 즉 보호비를 갈취하는 사업이었다. 이들은 모든 마을로부터 현금, 가축 또는 포도주로 보호비를 뜯어냈으며 보호비를 내지 못하면 처형과 방화로 처벌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는 비싼 통행료가 부과되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갈취는 현지 프랑스 인들의 분노를 샀으며 몇몇 지역에선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렇게 프랑스에서의 잉글랜드군의 수익 사업이 알려지면서 잉글랜드 인들에게 프랑스는 일종의 엘도라도의 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 인들은 전쟁이 다시 재개되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드워드 국왕이 다시 전쟁이 일으키길 희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도 이러한 반응을 간파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전쟁의 필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필리프의 잉글랜드 정복 칙령을 낭독하게 하는가 하면 주(州) 법정이나 장터에서는 에드워드 국왕의 칙령이 낭독되었는데 여기에는 노르망디 침공이나 크레시 전투 등의 사안 축소되어 표현되는 반면 프랑스의 침공 위협은 크게 부풀려졌다.

여기에 더해 에드워드는 윈체스터 주교 출신인 윌리엄 에딩턴을 재무상에 앉혀 정부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게 했는데, 그는 정부의 모든 재정을 재무부 산하로 집권화 시키는 한편 의회를 설득하여 전쟁에 필요한 재정을 준비시켜 나갔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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