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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by The Raven 2022. 6. 2.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재무상 윌리엄 에딩턴을 통해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즈음, 잉글랜드는 나바르의 국왕 악인왕(Charles the Bad) 샤를 2세를 우군으로 맞이하였다.

나바르의 국왕, 악인왕 샤를 2세 (혹은 카를로스 2세)
나바르(혹은 나바라) 왕국의 문장과 위치 (1400년 기준)

그는 나바르 왕국의 군주이면서, 노르망디에 여러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 인근에도 부유한 영지를 가지고 있어 오히려 에드워드 3세보다도 프랑스 왕위를 자격이 충분했다.

그의 어머니(나바르의 잔 2세)는 루이 10세(1316년 사망)의 딸로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인 이사벨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다. 하지만 그녀의 삼촌들은 그녀의 어머니(부르고뉴의 마리그리트)가 행실이 문란하다는 평판을 내세워 잔 2세의 왕위 주장을 무시하였다.

프랑스 왕가 가계도에서 나바르의 샤를 2세 위치

샤를은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빼앗겼다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고 프랑스로부터 여러 영지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러한 손실을 보전하고자 프랑스 왕 장의 딸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샤를은 에드워드와 손잡고 플랜태저넷과 발루아를 서로 싸우게 만든 뒤 장을 설득하여 높은 가격으로 나바르와의 동맹을 사들이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나바르 국왕 샤를은 1354년 프랑스의 총 사령관이자 지난 레에스파뇰쉬르메르 해전의 카스티야 제독이었던 카를로스 데 라세르다를 노르망디로 유인한 뒤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장은 이 소식에 격노했지만, 샤를이 에드워드 3세와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에 겁을 먹어 샤를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코탕탱 반도(노르망디에서 영국 해협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의 넓은 땅덩어리를 떼어줘 그를 달래려 했지만 샤를의 분노는 누그러 들지 않았다. 

1355년 10월 에드워드 3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칼레로 진군하였으나 한 달 만에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대신 그의 아들 흑태자가 국왕 대행으로 임명되어 군사 활동을 대신 수행하였다. 

그는 9월에 보르도에 도착하고 10월에 2,600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보르도를 떠나 두 달동안 랑그로크 지방 전역에서 살상과 방화를 저질렀다. 

1355년 흑태자 부대의 슈보시 이동 경로 (출처: 위키백과)

이러한 초토화 작전(슈보시)의 목적은 적국의 과세 대상인 토지와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적의 세수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은 접시와 돈, 그밖에 카펫과 같은 값비싼 물건들을 빠짐없이 약탈하였고 쑥대밭이 된 지역은 면세 조치를 포함한 여러 재건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기 까지 몇 년이 걸렸다. 

프랑스의 다른 지역들은 랑그도크에서 들려온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장 국왕은 대군을 소집하여 이듬해 봄 샤르트르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샤를 2세는 자신이 잉글랜드에 붙을 거라는 소문을 퍼뜨려 장 국왕으로부터 많은 양도를 얻어냈으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도팽(프랑스의 왕자를 지칭하는 표현)에게 접근해 환심을 샀다. 자신의 아들과 샤를 2세가 가깝게 어울리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장 국왕은 결국 1356년 4월 루앙에서 도팽과 식사 중인 샤를 2세를 체포하고 그를 루브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에드워드는 여름이 끝날때 즈음 브르타뉴에 있는 랭커스터 공작에게 6,000명을 주어 노르망디로 보내 나바르 국왕(샤를)의 지원군을 모집한 다음 앙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랭커스터의 미션은 자신보다 작은 규모의 흑태자 군대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흑태자는 1356년 8월 4일 베르주라크를 출발하여 리무행, 베리를 거쳐 북동쪽으로 이동하며 눈에 보이는 도시는 모두 초토화시켰고 로모랑탱성을 함락시켰다.

그 다음 군대를 북서쪽으로 틀어 툴로 진격하였다. 랭커스터는 프랑스 군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루아르 강을 건너 왕세자 부대와 합류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흑태자 군대와 프랑스 군의 이동 경로 (출처: 위키백과)

9월 초, 흑태자는 약탈품을 끌고 느리게 이동하는 자신의 군대를 프랑스의 대규모 병력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최대한 빠른 길을 이용해 보르도로 퇴각하려 했지만, 장 국왕은 잉글랜드 왕세자의 측면을 우회하여 먼저 푸아티에에 도착해 보르도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장 국왕의 휘하에는 1만 6,000 ~ 2만 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데, 2,000명의 석궁수를 비롯하여 다수의 경무장 병력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중기병이었다.

9월 17일 두 부대가 우연히 충돌하고 나서야 장 국왕과 흑태자는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게 되었고 왕세자는 푸아티에에서 남동쪽으로 7마일 떨어진 모페르튀라는 이름의 마을 야영지로 행군하였다.

흑태자는 어떻게든 전투를 피하고 싶었지만, 가능한 퇴로는 이미 막혀있었고 결국 이곳에서 프랑스의 대군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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