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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3)

by The Raven 2022. 4. 6.

에드워드와 함께 영국 해협을 넘어 노르망디로 향하는 잉글랜드 군대는 기사, 창기병, 궁수(기마 궁수와 보행 궁수) 및 단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당시 잉글랜드 중기병은 금속 고리가 연결된 형태의 '미늘 갑옷'과 원뿔형 투구, 팔꿈치 보호대와 발 보호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필리프 6세의 기사들은 어깨와 팔다리를 철판으로 보호하고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얼굴 장갑이 개폐형으로 되어 있는 헬멧(bascinet)을 착용하였다. 프랑스 기사의 판금 갑옷에 비하면 잉글랜드 군의 장갑은 확실히 구식이었다. 

13~14세기의 영국 기사의 갑옷(좌)과 프랑스 기사의 갑옷(우)

중기병 운용에는 막대한 비용과 물자가 요구되었는데, 중기병 한 기를 운용하기 해서는 무장한 시종 두 명과 세 마리의 말(전투용 군마, 장비 운반용 말, 비전투 시 승용마)이 필요했다. 세 마리의 말을 운용할 수 없는 일부 중기병들은 가벼운 갑옷을 입어야 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의 무기인 잉글랜드 장궁(English long-bow)은 군사 전술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이 장궁은 사실 웨일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드워드 1세 이래로 모든 시골의 장정들은 법에 따라 일요일마다 나무 둥치에 활을 쏘는 연습을 해야 했고, 이는 국가적으로 궁수에 대한 자원 풀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1346년에 이르러 장궁은 규격화 되었고 궁수들은 화살을 스물네 발씩 소지하였다. 장궁수들은 분당 열 발에서 많게는 열두 발도 쏠 수 있었다. 사정거리는 135미터가 넘었고, 55미터 거리에서는 판금 갑옷도 뚫을 수 있었다. 런던탑에는 활과 화살을 저장하는 거대한 무기고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활대의 다수가 기옌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장궁의 잠재력과 살상력은 그때까지 유럽 대륙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투사 무기는 석궁이었다. 석궁은 긴 사정거리와 보다 높은 명중률, 그리고 발사체의 빠른 속도라는 강점이 있었지만 상당히 무거웠고(9kg) 분당 네 발이라는 느린 발사 속도가 단점이었다. 

현대의 연구를 통해 중세 시대의 병참술은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대부분의 군대는 현지에서 물자를 조달하였지만, 병력이 집결하는 동안에는 보급 기지가 필요했다. 보급 식량으로는 소금에 절인 고기, 훈제 육류, 말린 생선, 치즈, 밀가루, 귀리, 콩과 함께 막대한 양의 에일 맥주가 있었다. 


1346년 7월 13일 잉글랜드 함대가 셰르부르반도 북쪽의 라오그에 상륙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디데이 때처럼 노르망디 주민들은 이들이 올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많은 도시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의도적으로 풍요로운 시골 지방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슈보시, chevauchée)을 개시하였다. 주민들의 오두막, 방앗간, 과수원등은 있는 대로 파괴되었고, 주민과 가축들의 목이 베어졌다. 그밖에 주민들에 대한 온갖 종류의 고문과 잔학 행위가 발생하였고, 잉글랜드 군대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약탈의 단맛에 빠졌다. 

바르플뢰르(Barfleur), 셰르부르(Cherbourg), 몽트부르 등의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고, 7월 26일 에드워드의 군대는 캉(Caen)에 쳐들어 갔다. 캉의 수비대가 항복하자 잉글랜드 군대는 약탈, 강간, 살인을 시작했다. 주민들은 좁은 골목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에드워드는 주민 전체를 살육하고 도시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다. 주변의 만류로 이 명령은 철회되었지만, 약탈은 사흘간 계속되었고, 결국 3000명의 주민이 죽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교회와 축성된 건물은 건들지 말라는 관례적인 명령을 내렸지만, 수녀들은 병사들에게 겁탈되고 많은 종교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게랭의 수도원은 잿더미가 되었고 수도원 도시 트로아른도 곧 함락되었다. 

잉글랜드 군의 이동 경로

잉글랜드의 군대가 살육과 방화를 저지르며 파리로 진군해오자, 필리프는 병력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루앙으로 증원군을 보냈다. 이로써 프랑스의 관심은 브르타뉴와 기옌에서 이 쪽으로 옮겨갔고, 에드워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푸아시까지 도달한 잉글랜드 군대는 여기서 진군을 멈췄다. 이들에게는 파리를 공략하는 데 필요한 공성대와 포위 장비가 없었고, 필리프가 집결시키고 있는 대군에 비하면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잉글랜드 군은 다시 눈에 뛰는 도시는 닥치는 대로 파괴하며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솜 강을 건너 크레시 앙 퐁티외(Crécy-en-Ponthieu)에 도착한 군대는 여기서 이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강행군으로 지쳐있었고, 식량과 포도주는 바닥난 상태였다. 이들은 마을 근처의 언덕 풀밭에 진을 치며 프랑스 군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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