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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2)

by The Raven 2022. 4. 5.

슬라위스 해전이 끝난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 3세는 충분한 전쟁 자금을 마련해주지 못한 정부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였고, 그 주범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스트랫퍼드를 지목하였다.

스트랫퍼드는 국왕의 분노를 사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교묘한 정치 수완을 발휘해 극적으로 국왕과 화해의 길을 마련한다. 에드워드 입장에서도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려면 국내 유력자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1341년 의회에서 승인한 특별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만성적인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럽의 여러 가문과 잉글랜드의 금융업자 집단이 에드워드에서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파산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341년 4월 브르타뉴의 공작 장 3세(Jean III)가 죽었다. 장 3세가 죽은 후, 그의 조카딸인 블루아 백작부인 '잔(Jeanne)'과 공작의 이복동생 몽포르 백작 '장(Jean de Montfort)'이 브르타뉴의 작위 계승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공작위가 공석이 된 브르타뉴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블루아의 잔을 브르타뉴의 공작으로 인정했다. (필리프 6세 본인이 왕위에 오를 때는 '여성은 왕이 될 수 없다(살리카법)'라고 주장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필리프 6세가 잔을 지지하자 몽포르의 장은 잉글랜드로 건너가 에드워드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공표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에드워드 3세는 장을 브르타뉴의 공작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리치먼드 백작에 봉하였다. 

잉글랜드가 이 권력 투쟁에 개입하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잉글랜드의 작은 배들이 보르도나 이베리아 반도로 가기 위해서는 비스케이 만을 거쳐야 하는데, 비스케이 만은 파도가 매우 사나웠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배들은 해안선을 따라 운항하면서 브르타뉴의 항구를 드나들 수 밖에 없었고, 브르타뉴의 사략선으로 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블루아의 '잔'과 몽포르의 '장'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브르타뉴 계승 전쟁

하급 귀족과 서쪽의 켈트어를 사용하는 농민들은 몽포르의 장을 지지했다. 반면, 대귀족과 동쪽의 프랑스 어를 사용하는 부르주아들은 블루아의 잔을 지지했다. 

1341년 11월 몽포르 백작은 낭트에서 프랑스인들에게 포위되었다. 프랑스인들은 투석기로 몽포르의 기사 30명의 머리를 잘라 성 안으로 던져 넣었고, 이에 겁에 질린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장은 포로가 되어 파리로 끌려갔다. 하지만, 몽포르 백작의 부인 '잔'(블루아의 '잔'과는 다른 인물이다.)은 남편의 뜻을 이어 계속 저항하였고, 결국 1342년 가을, 1만 2천명의 병력을 몸소 이끌고 온 에드워드 3세에 의해 구조되었다. 

에드워드는 브르타뉴 공국의 세 개 도시 렌, 낭트, 반에 대한 포위전을 벌였다. 필리프 6세의 아들이자 노르망디의 공작 장(이쪽도 몽포르의 '장'과는 다른 인물이다...)은 포위된 세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잉글랜드 군의 최소 두 배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는 유리한 위치에 참호를 파고 노르망디 군에 대항하였다.

결국 1341년 1월 휴전 규섭이 진행되었고 에드워드는 토머스 대그워스 경의 병력을 브르타뉴의 주요 요충지에 배치한 후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1344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양국 간의 평화 회담을 주선하였다. 

휴전 협상을 통해서도 양국의 입장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잉글랜드는 1345년에 다시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에드워드는 플랑드르와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그로스먼트의 헨리(Henry of Grosmont)로 하여금 가스코뉴 상부(기옌 지방)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공격을 통해 베르주라크, 라레올, 아주네 등의 많은 도시가 잉글랜드의 수중에 떨어졌였다. 이와 동시에 토머스 대그워스 경은 브르타뉴에서 공세를 기새하여 프랑스 요세들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

가론강과 도르도뉴강 근처 도시에서 싸우는 양군

이듬해 봄, 노르망디 공작 '장'은 에귀용(Aiguillon, 대략 라레올과 아쟁의 중간정도에 위치한 도시)에서 더비 백작을 포위하는 등 남서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진행하였다. 

에드워드는 제3의 전선을 준비하였다. 그가 선택한 제3의 전선은 노르망디였다.

노르망디를 선택한 것이 우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필리프 6세와의 사이가 틀어져 잉글랜드로 도망쳐온 고드프루아 다르쿠르라는 노르망디 귀족은 노르망디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에드워드에게 조언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예상했던 침공 경로였던 플랑드르는 친 잉글랜드파였던 야콥 판아르테펠더가 축출되고 친 프랑스파 백작이 복귀하면서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1346년 7월 5일 에드워드는 1만5천명의 병력과 이들을 지원하는 대규모의 보급선을 이끌고 노르망디의 라오그로 향했다...

잉글랜드군의 상륙지점 라오그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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