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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4)

by The Raven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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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하고 국왕이 사로잡힌 프랑스는 대혼란에 빠졌다. 아직 현명왕으로서 재능을 드러내기 전인 열여덟 살의 젊은 왕세자 샤를에게는 이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바르 국왕의 추종자들은 노르망디에서 들고일어났으며, 프랑스 전역에서 루티에(routier, 잉글랜드인, 가스코뉴인, 심지어 프랑스인도 포함된 자유 부대)들이 성을 점령하고 노략질을 하며, 시골 지역을 공포에 빠뜨렸다. 

삼부회는 정부의 개혁과 왕실 자문관들의 축출을 요구했고, 기사, 성직자, 부르주아로 구성된 상설 자문위원회의 지도에 도팽(프랑스 왕세자)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팽에겐 에티엔 마르셀(Étienne Marcel)이 이끄는 부르주아 계층은 특히 위험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나바르의 추종자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파리 시청사 옆에 서 있는 에티엔 마르셀의 동상 (출처 - 위키백과)

1357년 말 나바르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와서는 도팽에게 자신을 사면하라고 강요했다.

1358년 1월, 런던조약에 따라 도팽의 기옌의 주권과 함께 리무쟁, 푸아투, 생통주, 퐁티외를 포함한 프랑스 영토의 1/3 이상을 넘겨주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장 국왕의 몸값은 금화 400만 크라운으로 책정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그 대가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기로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앙주와 멘, 노르망디 등에 대한 종주권을 추가로 요구했으며 이 요구(2차 런던조약)는 거절당했다. 사실 에드워드도 이 제안이 거절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저 새로운 군사적 개입을 위한 구실로써 요구했을 것이다. 

1358년 2월, 마르셀 일파가 도팽의 내실로 난입해서 도팽의 눈앞에서 샹파뉴 원수와 노르망디 원수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3월에 도팽은 파리에서 도주하였다. 

1358년 5월에는 자크리(Jacquerie)의 난이 있어 났다. 성벽 안의 영주들, 도시의 부르주아들과는 달리 성벽 밖의 프랑스 농민들을 잉글랜드 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군이 오는지 감시해줄 보초가 있을 때만 일을 할 수 있었고, 밤에는 동굴이나 슾지, 숲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게다가 영주들은 전쟁과 흑사병으로 감소한 세수를 보충하기 위해 이들의 재산을 빼앗아가며 핍박하였다.

결국 파리 북쪽에 있는 보베(Beauvais)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농노들이 들고일어나 영주와 맞섰다. 센 강 북쪽에서 출현한 수 천명의 자크들은 영주 가족을 참살하고 성과 영주의 저택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서 묘사된 자크리의 난

7월 말에 마르셀이 그의 지지자 중 한 명에게 도끼로 참살되었고, 도팽은 다시 파리로 귀환하였다. 하지만, 나바르는 여전히 프랑스 전역을 활보하며 국왕의 군대를 무찔렀다. 

같은 해 10월, 잉글랜드 국왕이 이끄는 군대가 다시 프랑스로 상륙하였다. 지난 전투에서의 성공과 전리품에 고무된 많은 귀족과 병사들이 이 새로운 군사 작전(Reims campaign)에 참가하였고, 랭스로 향하는 에드워드의 군대는 칼레에서 시작하여 아르투아, 티에라슈, 샹파뉴를 지나며 보이는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학살을 자행하였다. 

랭스의 공작 겸 대주교는 잉글랜드 군과의 장기전에 대비해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고, 잉글랜드 군은 12월에 랭스의 성벽 앞에 도달하였다. 잉글랜드 군에는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도 있었는데 그는 브르타뉴 습격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국왕이 몸값을 내놓아 풀려난 이력이 있었다. 

제프리 초서

그는 전쟁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냈고, 훗날 "전쟁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전쟁! 전쟁!'을 외치는 이들이 많도다"라고 썼다. 

1360년 1월, 잉글랜드 군이 끔찍한 고생을 한 뒤에야 에드워드는 랭스를 포기하였다. 이후 그는 부르고뉴, 니베르네를 지나며 이 일대를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파리를 공격할 만큼 자신의 군대가 강하지 않다고 생각한 에드워드는 파리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도팽과 프랑스 인들을 파리 밖으로 끌어내려했지만, 현명한 도팽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파리 지역에서 2주를 보낸 후 에드워드의 군대는 다른 지역을 초토화하기 위해 이동하다 샤르트르 인근에서 우박을 동반한 폭풍을 겪고 혼란에 빠진 일이 있었다.(검은 월요일) 

이 사건 직후,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장이 강화 제안을 가지고 에드워드를 찾아왔다. 랭커스터는 더 이상 작전을 진행하기 어려움을 설명하며 국왕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였다. 에드워드는 결국 강화 제안을 받아들였고, 1360년 5월 1일 샤르트르 근처 브레티니라는 작은 마을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흑태자와 도팽은 일주일 만에 합의에 도달하였다. 장 국왕의 몸값은 금화 300만 크라운(50만 파운드)으로 삭감되었고, 영토도 1차 런던 조약 때보다 축소되었다. 

10월 24일 브레티니 조약(Treaty of Brétigny)이 칼레에서 비준되었고 약속된 지역이 잉글랜드로 모두 양도되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기로 합의하였다. 

브레티니 조약에서의 프랑스와 잉글랜드 영역

영토 이양은 1361년 가을에 시작되어 이듬해 봄 대부분의 지역이 잉글랜드로 할양되었다. 일부 지역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유혈 사태는 없었다. 새 국가의 통치자는 에드워드 3세가 아닌 보르도의 흑태자였고, 그에게는 아키텐 공작 작위도 내려졌다. 

1360년 10월, 장 국왕의 몸값 중 일부인 금화 40만 크라운이 지급되자 에드워드는 장 국왕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대신 아들 세 명은 인질로 남아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장의 둘째 아들인 앙주 공작이 잉글랜드로 복귀하길 거부하였고, 기사도 넘치는(?) 장 국왕은 1364년 스스로 런던으로 돌아갔다.

런던에서 호화로운 환대를 받으며 살던 장 국왕은 1364년 4월 8일 사보이 궁에서 4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세인트 폴 성당에서 진혼 미사가 거행된 뒤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돌아와 생드니 성당에 묻혔다. 

에드워드 3세는 비록 프랑스 왕위에 오르진 못했지만, 강력한 군사력의 프랑스를 굴복시키며 브레티니 조약이라는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계속된 전쟁과 초토화 작전으로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끔찍한 참사를 겪어야 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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