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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by The Raven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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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장 2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국왕 샤를 5세는 진정 프랑스의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앙상하고 좁은 얼굴의 샤를 5세는 몸이 지독하게 허약해서 궤양에 시달리고 병명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달고 살았다. 그는 신학과 역사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책을 좋아하는 인물이어서 루브르의 탑에 1,200권에 달하는 책을 사슬로 묶어 서재를 만든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절도를 막기위해 사슬로 책을 묶어놓는 관행이 있었다.)

프랑스 화가 Gillot Saint-Evre가 그린 샤를 5세의 초상화 (1838년 작)

연대기 작가들은 그에게 카롤루스 사피엔스(Carolus Sapiens)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 별명은 현명한 샤를이라고보다는 박식한 샤를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국가의 문제를 법률적으로 접근하여 법률가처럼 올바른 절차와 세부 사항을 꼼꼼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직 브레티니 합의를 뒤집어 잉글랜드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프랑스는 그보다 당면한 다른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그것은 브르타뉴에서의 전쟁, 나바르 국왕, 플랑드르의 왕위 계승 문제, 마지막으로 루티에(자유 부대)들이었다. 

브르타뉴 공국은 여전히 몽포르 파(派)와 블루아 파가 싸우고 있었고, 잉글랜드는 이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1362년 몽포르의 장(Jean de Montfort)의 아들인 장 4세가 잉글랜드에서 돌아왔고 마침내 1364년 9월, 존 챈도스 경과 휴 캘벌리 경의 뛰어난 지휘 하에 오레 전투(Battle of Auray)에서 숙적 블루아의 샤를을 격파하고 그를 죽였다.

플랑드르 화가 Loyset Liédet이 그린 오레 전투 (15세기 작)


비록 친 프랑스파가 졌지만 이제 브르타뉴 지역은 안정을 되찾았고 1365년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는 샤를 5세에게 신하로서 예를 표했다. 

파리 근처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던 나바르 국왕(악인왕 샤를)은 샤를 5세에게 더 큰 위협이었다. 1364년 초 그는 장 국왕이 부르고뉴 공국을 아들 필리프에게 하사한 것에 분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추종자를 모으고 가스코뉴 용병들 뿐만 아니라 자유 부대에서도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카프탈 드 뷔슈의 병력(가스코뉴 용병)은 1364년 5월 코슈렐에서 궤멸되었고, 노르망디 깊숙이 침투한 프랑스 군은 나바르의 근거지들을 장악하였다. 악인왕 샤를은 이듬해에 강화를 맺고 파리 인근의 영지를 모두 내놓았다. 이로써 나바르 국왕도 더이상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다. 

플랑드르의 경우 잉글랜드의 통제권 아래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자신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잉글랜드 왕자인 에드먼드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샤를 5세는 근친혼을 근거로 그 결혼에 대한 교황의 금지를 이끌어냈고, 수년간의 외교적인 노력 끝에 마침내 마리그리트를 자신의 동생인 부르고뉴의 필리프와 결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유 부대의 루티에들은 샤를 5세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과거의 빈곤한 농노 신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려는 이 참전 병사들은 종종 흑태자 밑에서 복무하였고, 부대가 해산된 뒤에도 농민들을 수탈하며 먹고 살았다. 이들은 대단히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움직였으며, 부대마다 전리품을 분배하는 서기와 참모들로 구성된 지휘체계가 있었다. 

루티에들은 아무 이유없이 눈에 보이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잔인하게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육하였다. 루티에는 브르타뉴인, 에스파냐인, 독일인, 잉글랜드인등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되었지만, 프랑스 인들은 출신에 관계없이 이들은 잉글랜드인들이라고 불렀다. 

브레티니 조약 이후에도 이들은 곳곳에서 활동하였고 잉글랜드인의 발명품인 슈보시(초토화 작전)와 파티스(보호비)를 활용하며 점차 규모를 키워갔다. 하지만, 샤를은 이 암적인 존재들을 박멸할 군사도 돈도 없었고 현지 당국은 이들을 돈으로 매수해야 했다. 

1365년 샤를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던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Enrique of Trastámara)가 이복형제인 잔혹왕 페드로(Pedro the Cruel)에 맞서면서 샤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샤를은 매우 기뻐하여 동원할 수 있는 루티에들을 모두 베르트랑 뒤게슬랭(Bertrand du Guesclin) 경에게 딸려서 피레네 산맥 너머로 보냈다.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좌)와 페드로(우)

이들은 엔리케를 카스티야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하지만, 2년 뒤 엔리케가 흑태자에게 패배하자 다시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왔다. 잔혹왕 페드로는 아키텐 공작 흑태자에게 기푸스코아(Guipúzcoa) 지방과 상당한 사례금을 조건으로 도움을 구했고 흑태자는 혼쾌히 응했다. 군대를 이끌고 1367년 4월 2일 나헤라에서 압승을 거둔 흑태자는 페드로를 왕좌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1369년 페드로는 다시 이복형제 엔리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살해되었다. 당연히 엔리케는 잉글랜드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흑태자는 페드로가 약속한 사례금을 받지 못했다. 

흑태자의 아키텐 공국 통치는 처음부터 그다지 원활하지 않았다. 흑태자를 따라 온 잉글랜드 인들은 아키텐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전의 지배 체제와 달리 흑태자의 새로운 행정 체계는 현지인들의 많은 불만을 샀다. 

게다가 흑태자는 웅장한 궁정과 연회, 마상 창시합에 많은 돈을 썼고, 1364~1366년 간 혹독한 푸아주(fouage, 화덕세)를 부과하였다. 그리고 페드로 국왕으로부터 약속한 돈을 받지 못하게 되자 다시 5년간 화덕세를 요구했고 이에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다. 

1368년 (흑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르마냐크 백작(Count of Armagnac)과 알브레의 아르망아마니외가 이끄는 기옌의 고위 귀족들 중 일부가 흑태자의 과도한 과세에 반대하며 샤를 5세에게 청원하였다. 이들의 청원을 허용하는 것은 아키텐 지방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었고 이는 명백한 브레티니 조약 위반이었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종주권 포기를 선언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 5세는 법적 절차를 영리하게 이용하면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의 입지를 축소시킬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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