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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by The Raven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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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잉글랜드에서 아키텐 지역을 빼앗긴 프랑스의 샤를 5세는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아버지 장 2세의 몸값 마련을 위해 거두었던 세금은 프랑스 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사용되었고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급여를 지급받을 수 있게 신경 썼다.

그가 특별세를 통해 거두어들이는 수입은 잉글랜드 의회가 에드워드 3세에게 허용한 전시 세입의 열 배가 넘었고 (비록 상비군이라 부를 규모는 아니었지만,) 3,000~6,000명의 중기병과 800명의 석궁수로 구성된 상시 병력을 갖추고 그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도시의 거주민들에게는 성벽 방어에 도움이 되도록 활쏘기 연습을 시켰고 파손된 성채는 보수되어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았다. 영주들은 제대로 된 수비대를 구성하도록 자금을 지원받았고 방어가 불가능한 성채는 아예 철거되었다. 

비록 샤를 5세 본인은 한 번도 전역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는 모든 군사 작전을 주도하였다. 그의 전략은 잉글랜드 군과의 전면전은 피하는 대신 초토 전술과 게릴라 습격전을 결합한 것이었다.

샤를 5세는 변경의 수비대나 루티에 중에 실력이 뛰어난 자를 중용하였는데, 이 또한 그의 대(對) 잉글랜드 전술에 입각한 것이다. 

샤를 5세는 올리비에 드 클리송(Olivier de Clisson), 부시코(Boucicaut), 아모리 드 크라옹(Amaury de Craon) , 베그 드 빌렌, 장 드 비엔(Jean de Vienne) 제독과 같은 다양한 인물을 중용하였고,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베르트랑 뒤게슬랭(Bertrand du Guesclin)을 임명하였다.  

왼쪽부터 올리비에 드 클리송(Olivier de Clisson), 부시코(Boucicaut), 장 드 비엔(Jean de Vienne), 베르트랑 뒤게슬랭(Bertrand du Guesclin)

샤를 5세의 뛰어난 지략은 뒤게슬랭의 기용에서 잘 드러난다. 뒤게슬랭은 대규모 전투나 포위전에서는 잉글랜드 군을 격파할 실력이 없었으나 샤를 5세의 파비우스적 전술을 제대로 이해하여, 프랑스에게 전략적 승리를 안겨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파비우스는 2차 포에니 전쟁 때 적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적의 보급선과 후방을 괴롭히는 지연 전술로 유명했던 로마 장군의 이름으로 샤를 5세도 뒤게슬랭에게 잉글랜드와의 정면 승부는 피하면서 그들의 후방을 괴롭히도록 주문하였다. 

1368년 내내 샤를 국왕의 부하들은 아키텐의 대귀족, 지주, 주교 및 수도원장들이 올린 900여 건의 탄원을 수집하였다. 이 모든 것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그 해 말이 돼서야 프랑스 국왕은 자신이 그러한 탄원을 수용할 자격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1369년 1월 그는 흑태자에게 탄원에 답하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흑태자는 샤를 5세의 명령을 전달하러 온 사절단을 쏘아보며 6만 군사와 함께 파리로 가겠다고 험악하게 대답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에스파냐 전역 이후 그는 이질과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려 말에 오를 수 없었고 가마로만 이동할 수 있었다.  

아들보다 정세 판단이 빨랐던 에드워드 3세는 일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덕세를 철회하라고 말했다. 또한 샤를에게 아키텐에서 온 탄원을 받지 말라고 간청하는 한편 10년 전 브레티니에서 정한 대로 아키텐에 대한 공식적인 포기 선언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샤를 5세는 이를 묵살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도전하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에드워드 국왕은 격노하였고 1369년 전쟁이 선포되었다.

1369년 11월 샤를 5세는 아키텐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잉글랜드 측이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아베빌과 퐁티외 백작령을 전격적으로 점령하였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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