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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by The Raven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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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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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아키텐을 전격적으로 접수한 프랑스는 아베빌(Abbeville)과 퐁티외(Ponthieu)를 점령하고 이어 루에르그 전역을 수복하였다.

흑태자는 급히 존 챈도스 경을 불러들였지만, 그는 1369년의 마지막 날, 이름없는 전투에서 어이없이 전사하고 말았다.

장 프루아사르 연대기의 삽화에 묘사된 존 챈도스의 죽음

프랑스의 반격에 대항하기 위해 에드워드 국왕의 셋째 아들인 곤트의 존은 1369년 여름, 노르망디로 침입하여 (이제는 잉글랜드의 전통이 된) 슈보시를 다시 전개하였다.

잉글랜드는 병사들에게 급여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어서 전쟁 전리품으로 보수를 대체하였고, 샤를 5세도 이 끔찍한 슈보시가 자행되는 것을 알았지만, 끝까지 병사들에게 전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유리할 때에도 전면전을 피하였고 대신 야간 기습과 매복을 주로 활용하여 잉글랜드 군의 보급선과 연락망을 끊는 형태로 적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데에 집중하였다.

또한 샤를 5세는 잉글랜드 군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좋은 조건과 돈을 제시하기도 했고, 반대로 아키텐의 프랑스인들에겐 잉글랜드에 대항해 봉기하도록 유도하였다.

1370년, 리모주(Limoges)의 수장이자 흑태자의 아들의 대부(代父)를 섰던 장 드 크로 주교가 잉글랜드에 반발하며 봉기하였다. 흑태자는 주교의 배신에 크게 분노하였고, 잉글랜드 군은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판 후 이를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성벽을 붕괴시켰다.

리모주 포위전을 묘사한 그림 (작가 미상)

곧 이어 무너진 성벽 사이로 잉글랜드군이 쏟아져 들어갔고 성은 그대로 함락되었다.

분노한 흑태자의 명령으로 리모주에서만 3,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나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은 잉글랜드에 대항해 계속 반기를 들었다.

리모주 포위전 이후 병세가 더욱 악화된 흑태자는 곤트의 존에게 뒷일을 맡기고 1371년 1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흑태자가 떠난 후에도 샤를 5세의 영토 수복 작전은 계속되어 푸아티에(Poitiers), 라로셸(La Rochelle), 위송(Husson), 앙구무아(Angoumois)와 생통주(Saintonge)가 차례로 프랑스의 수중에 넘어갔다.

잉글랜드는 프랑스내 영토를 수비할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주요 거점을 상실하였다.

1372년 8월, 에드워드 국왕과 (여전히 병에 앓고 있던) 흑태자는 4만의 중기병, 1만의 궁수를 태운 400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대함대는 지독한 악천후를 6주 동안 시달리다 항구로 귀환하였고, 이 시점에서 흑태자는 아키텐 공국을 완전히 포기하고 버컴스티드 성에 칩거하게 된다.

이후 계속 병석에 누워 지내던 흑태자는 결국 1376년 4월에 세상을 떠나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rdral)에 안장되었다.

캔터베리 대성당내 흑태자의 무덤 (출처 - 위키백과)

이제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의 뒤를 이를 잉글랜드 왕가의 용사는 카스티야 국왕이자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인 곤트의 존이었다.

곤트의 존은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막대한 규모의 영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잔혹왕 페드로의 사위로서 적법한 카스티야의 국왕이었다. 하지만 막강한 부와 야망에 비해 그가 가진 능력은 아버지나 큰 형에 비할 바는 못 되었으며 프랑스의 반격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1373년 여름, 곤트의 존은 3,000명의 중기병과 8,000명의 궁수를 이끌고 새로운 군사 활동을 개시하여 프랑스 중앙에 끔찍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이 부대는 보르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고 단 한 개의 도시도 손에 넣지 못했다.

1373년 말 아키텐 공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기옌마저 축소되어 있었다. 앙주 공작은 바자와 라레올(La Réole)마저 장악하였고, 플랜태저넷 왕가의 오랜 봉신이었던 알브레(Albret)도 발루아 왕가로 넘어왔다.

브르타뉴 공작은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으며, 칼레와 노르망디에서 소규모의 수비대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1374년에 이르자 양측 모두 지쳐있었다. 잉글랜드는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고 슈보시도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샤를 5세도 병세가 악화되어 기존의 질환에 통풍까지 추가되었다.

1374년 1월, 프랑스의 총 사령관 뒤게슬랭과 곤트의 존은 페리괴(Périgueux)에서 만나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1375년 6월, 추가적인 협상이 진행되어 아키텐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2년간의 휴전이 합의되었다.

1377년 6월 21일 에드워드 3세가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잉글랜드에 수많은 승리를 안겼으나 탐욕스러운 정부 앨리스 페러스(Alice Perrers) 때문에 많은 백성의 애도를 받지 못했다.

에드워드의 제위는 흑태자의 어린 아들인 보르도의 리처드가 승계하였다. 에드워드 국왕이 죽은 후,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장 드 비엔(Jean de Vienne) 제독은 강력한 해군을 앞세워 영국 해협을 건너갔다. 그의 목표는 잉글랜드의 증원군이 브르타뉴와 기옌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는 것이었다.

장 드 비엔 제독의 흉상

4,000명의 병력을 나눠 실은 50척의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의 라이(Rye), 루이스, 플리머스(Plymouth)를 파괴하였다.

8월에는 헤이스팅스(Hastings)를 불태웠으나 사우샘프턴(Southampton)과 폴(Poole)에서는 잉글랜드 군에 격퇴당했다.

1377년 앙주 공작과 뒤게슬랭이 기옌을 침공하면서, 기옌을 비롯한 프랑스 서부 전역에서 양 국가의 지리한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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