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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4)

by The Raven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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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1377년 앙주 공작과 뒤게슬랭 총사령관은 다시 기옌을 침공하였다.

프랑스군은 기옌을 지키던 잉글랜드의 토머스 펠턴 경을 포로로 잡고 베르주라크까지 함락했으나 기옌 사람들은 여전히 플랜태저넷 왕가에 충성하면서 항전하였다. 

1379년 잉글랜드 국왕의 대리 사령관으로 가터 기사 래비의 네빌 경(Lord Neville of Raby)이 보르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군의 전투 방식을 받아드려 전면전 대신 기습으로 적을 공격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지롱드강을 거슬러 모르타뉴를 탈환하였다.  

프랑스 지롱드강(Gironde estuary)

래비의 네빌 경은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동안 80군데가 넘는 도시와 요새, 성채를 탈환하였다.

브르타뉴에서도 프랑스군은 난관에 빠져있었다. 프랑스군은 브르타뉴를 점령했지만, 브레스트 항구를 손에 넣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리고 브르타뉴 인들은 브르타뉴가 프랑스에 통합되는 것에 반대하여 브르타뉴 공작 편으로 결집되었고, 공작은 브레스트를 자신의 맹방인 잉글랜드에 넘겼다.

프랑스 브르타뉴 주의 브레스트

1378년에 나바르 국왕(악인왕 샤를)이 다시 등장했다. 그는 '곤트의 존'의 딸 캐서린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곤트의 존에게 에브뢰 백작령(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을 넘기는 것을 제안하였고, 샤를 5세를 독살시키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프랑스 총사령관 뒤게슬랭은 즉시 노르망디에 남아있던 나바르의 마지막 영지를 침공했으나, 나바르 국왕 샤를은 피레네 산맥 너머 자신의 왕국(중세 스페인의 나바르 왕국)으로 도망치기 전에 노르망디 주의 셰르부르(Cherbourg)를 잉글랜드에 팔았고, 잉글랜드군은 이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브레티니 조약으로 평화가 유지되던 시기 뿐만아니라 프랑스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와중에도 불쌍한 농민들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들은 포로의 몸값과 전리품으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던 요새를 넘겨주고 평화롭게 물러나는 대가로 거액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가난하고 낮은 지위에 있었다가 부와 명예를 얻어 계층 이동을 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다.

대표적으로 노퍽의 사울(Saul of Norfolk)이라는 인물은 원래는 평범한 농노였으나 징집병에게 징집되어 브르타뉴지역에서 복무하다 칼레 근처 마르크 요새의 대장이 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백년전쟁 시기는 많은 농민들이 끔찍한 피해를 겪어야 했지만, 사울의 겨우처럼 출세의 시대로도 기억되는 시기였다.  

1378년 새로운 교황으로 이탈리아인 우르바누스 6세가 선출되었다. 

16세기에 그려진 우르바누스 6세의 초상 - 오노프리오 판비니오(Onofrio Panvinio) 작

그가 선출되기 전, 이미 교황청은 아비뇽 유수가 끝나 로마로 돌아간 상태였고 우르바누스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개혁을 단행할 생각이었다.

이에 놀란 추기경들은 그의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하며, 또 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였다. 

당연히 샤를 5세는 클레멘스 7세를 기쁜 마음으로 초대하여 아비뇽에 교황청을 재건하게 하였다.

이렇게 우르바누스 6세를 지지하는 로마 교황 지지 세력과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아비뇽 교황 지지 세력으로 서방 교회가 분열되면서 그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할 국제 기구가 사라져 버렸다. 

한편, 나날히 병세가 악화되어 고통스런 삷을 살고 있던 샤를 5세는 더 이상의 승전을 거두지 못하자 낙담하여 화평을 청했다.

그는 도르도뉴 강 남쪽의 아키텐 땅 전부와 앙굴렘을 넘기는 동시에 그의 딸과 (흑태자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인) 리처드 2세의 혼인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우르바누스의 추기경 중 한 명이 리처드 2세에게 다른 혼처를 주선하면서 무산되었다. 

프랑스 백성들은 정부가 전쟁 수행을 위해 거둬드렸던 혹독한 과세에 반발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결국 진압되었지만, 샤를 국왕은 농민들의 봉기에 놀라 전쟁 수행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었던 화덕세를 폐지하였다.

이 와중에도 잉글랜드인들은 악착같이 습격과 약탈을 자행하였고, 많은 농민들과 성직자들(수녀원의 수녀들)이 잉글랜드 병사들에 희생되었다. 

1380년 7월,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베르트랑 뒤게슬랭은 오베르뉴의 한 성을 포위하던 중 병사하였다. 

그리고 두 달 뒤인 9월 16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벵센에서 심장마비로 마흔셋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는 비록 잉글랜드인들을 프랑스에서 완전히 몰아내진 못했지만, 에드워드 3세가 정복했던 땅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샤를 5세가 스물 일곱살에 그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조각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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