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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2)

by The Raven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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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4)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프랑스의 침공 위협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잉글랜드 내에서는 글로스터 공작(Duke of Gloucester)이 된 버킹엄과 대법관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폴(Michael de la Pole) 경이 대립하고 있었다. 

서퍽 백작은 국내외로 잦은 실책을 범한 반면, 글로스터 공작은 프랑스의 침공 위협에 대한 잉글랜드 인들의 공포를 잘 활용하여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고, 결국 서퍽은 탄핵당해 해임되었다. 

글로스터의 동지인 애런든 백작은 플랑드르 선단을 공격하여 대중을 환심을 사는가 하면, 브르타뉴로 가서 프랑스에 대항한 잉글랜드-브르타뉴 연합 공격을 제안해 장(Yann IV)과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장은 적대적이었고, 애런들은 성과없이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387년 8월 리처드 2세는 친정을 선언하고 새로운 자문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러자 글로스터와 애런들이 군대를 일으켜 국왕의 총신들을 무찌르고 (국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후 글로스터와 애런들은 끝내 브르타뉴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 프랑스에 맞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만, 곤트의 존이 연합 공격에 참여하길 거부하자 이에 놀란 브르타뉴 공작도 공격을 포기하고 만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애런들은 1388년 6월 출항했으나 브르타뉴 인들이 말을 공급해주지 않자 내륙으로 진군할 수 없었고 프랑스 해안에서 사소한 싸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8월에 퍼시(Percy) 가문이 오터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참담하게 패하자 잉글랜드 북부 전역은 공포에 떨었고, 곤트와 다른 대귀족들은 다시 프랑스와 화평을 맺는 쪽으로 기울었다. 

오터번 전투 (장 프루아사르 연대기)

한편, 바다 건너 프랑스의 샤를 6세는 할아버지 장 2세를 점점 닮아가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1388년 11월 그는 숙부들을 국왕 자문회의에서 추방하고 아버지의 대신들(마르무제)을 재등용했다. 마르무제들은 잉글랜드와 화평을 맺기로 결정했고, 잉글랜드의 자문회의도 글로스터와 애런들의 의견을 누르고 협상을 시작했다. 

1389년 6월 18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절단은 칼레 근처의 루링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였다. 양측 모두 항구적인 합의를 보고자 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투르크를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떠날 수 있게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고, 리처드 국왕도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에는 여전히 글로스터와 애런들 같은 주전파들이 있었다. 그리고 곤트의 존이 왕위에 욕심이 있는 것도 불안 요소였다. 결국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화평을 이루는 길은 기옌 공국을 잉글랜드 왕위에서 분리하여 곤트와 그의 승계자들한테 물려주는 것이었다. 글로스터 입장에서도 (잉글랜드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곤트가 잉글랜드 밖에 있는 것이 편했으므로 이 방안에 지지하였다. 

1390년 리처드는 곤트를 종신 기옌 공작에 봉했고 1394년에는 공작 작위 계승권도 주었다. 

1396년 리처드는 샤를 6세의 아홉 살짜리 딸 이사벨과의 혼사를 진행했다. 칼레에서 거행된 결혼식에서 그는 샤를과의 만남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프랑스 국왕에게 '아비뇽에 복종하고 로마의 우르바누스 교황 퇴위를 위해 잉글랜드 교회를 설득하겠다'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약속을 전해들은 잉글랜드의 성직자와 시민들은 우리의 국왕이 프랑스인이 됐다며 불만을 표했고 반대 급부로 프랑스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글로스터 공작의 인기는 올라갔다. 

1397년 리처드 2세는 마침내 주전파를 숙청할 기회를 잡았다. 6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한 연회에서 글로스터 공작은 국왕에게 (연회에 참석했던) 브레스트 수비대가 급여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간하였다. 국왕은 '자신의 돈으로 이들이 런던 인근에서 살고 있으며 밀린 급여도 틀림없이 받게 될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글로스터는 폭발하여 '국왕께선 선조들이 정복했던 도시를 포기하기 전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적들로부터 도시를 빼앗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리처드 국왕은 격노했고, 공작도 자신이 선을 크게 넘었음을 깨달았다.

같은 해 8월, 글로스터와 애런든은 서식스에 있는 애런들성에서 쿠테타를 일으킬 음모를 꾸미지만, 이는 곧 발각되어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리처드 2세와 체포되는 글로스터 공작 (장 프루아사르 연대기)

애런들은 참수되었고, 글로스터 공작은 자비를 간청했지만, 결국 칼레의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다.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게 된 리처드 2세는 기존의 법과 관습을 무시하고 폭주해갔다.

그는 곤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볼링브루크의 헨리(Henry Bolingbroke)를 국외로 추방하고 1398년 곤트가 죽자 볼링브루크를 유배시키고 그의 영지를 모두 몰수하였다. 

이 일련의 사태와 자신들에게 공공연히 벌어지는 부당한 처사에 잉글랜드의 대귀족들은 격분했다. 1399년 리처드가 아일랜드로 떠나 있는 사이 볼링브루크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많은 이의 지지를 받아 국왕을 폐위시켰다. 

헨리 4세와 랭커스터가의 붉은 장미 휘장

볼링브루크는 헨리 4세(Henry IV)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House of Lancaster)를 열었다.

리처드는 몇 달 뒤 사망했는데 스스로 곡기를 끊은 것으로 보인다. 진심으로 프랑스와의 화평을 시도했던 리처드의 죽음은 양국 간의 전쟁이 재개됨을 의미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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