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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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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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4)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2)
한편, 영국해협 너머 프랑스에서는 발루아 왕족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고, 이는 프랑스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 외세의 침입을 받기 좋은 - 상황을 만들었다.
1392년 샤를 6세는 말을 타고 숲 속을 달리다 갑자기 수행원 네 명을 죽이고 자신의 조카까지 죽이려 하는 등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망상에 빠져 누구든 자기 가까이 오는 것을 경계하였다.
국왕이 미쳐버린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작 (대담공 필리프 2세, Philippe II le Hardi)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는 해마다 프랑스 왕실 세입의 1/8~1/6를 개인 재산으로 빼돌렸다. 샤를의 정신이 온전할 때는 오를레앙 공 루이(Louis I, Duke of Orléans)가 권력을 쥐었는데 그 역시 가혹한 세금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국가를 망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 두 세력은 수십 년 동안이나 프랑스를 분열시켜 잉글랜드 인들이 프랑스를 좌지우지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인들은 리처드 국왕이 폐위되고, (리처드의 화평 정책에 반대했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헨리 4세는 프랑스에 위원단을 파견하여 휴전이 계속 유효하다는 시그널을 보내 프랑스를 안심시킴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헨리 4세는 프랑스에서의 새로운 전역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국내외 사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모 수출에 대한 과세 수입은 전임 국왕 때보다 크게 줄어 있었고, 대귀족들의 반란, 웨일스에서 발생한 전면적 민족 봉기로 국왕은 골치를 앓고 있었다.
1402년 오를레앙 공 루이는 기옌 공작 작위를 샤를 6세의 어린 아들에게 하사했다. 이 작위는 이미 헨리 4세가 웨일스 왕자에게 하사한 호칭으로 이는 잉글랜드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었다. 1404년 프랑스 자문회의의 승인을 받은 오를레앙은 기옌 공국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다.
헨리 4세는 버클리 경에게 소규모의 병력을 딸려 보내 기옌을 지원하도록 했으나, 1405년 총사령관 샤를 달브레(Charles I d'Albret)가 북동부 국경 지대를, 클레르몽 백작은 도르도뉴 강 너머를, 아르마냐크 백작(Bernard VII, Count of Armagnac)이 가론강 남쪽에서 진군하여 보르도를 위협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1406년 보르도가 프랑스 군에 포위되자 보르도의 시장 토머스 스윈번 경은 포위전에 대비하는 한편, 보르도의 대주교 헨리 국왕에게 구원을 바라는 절박한 편지를 보냈다. 1406년 12월 보드도 사람들은 지롱드 강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데에 성공했고 많은 기옌 도시들도 랭커스터 왕가에 계속 충성하였다.
1407년 오를레앙 공작은 보르도 앞에 있는 지롱드 강변의 요새 블라예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자 낙담하여 퇴각하였다. 프랑스는 기옌뿐만 아니라 영국 해협에서도 잉글랜드가 수비하고 있는 여러 도시(와이트 섬, 다트머스, 칼레)를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 프랑스는 부르고뉴 파와 오를레앙 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부르고뉴 파는 1404년에 사망한 부르고뉴의 대담공 필리프의 뒤를 이은 아들 장(Jean sans Peur , John the Fearless)이 이끌고 있었는데, 1407년 11월 부르고뉴 파가 루이 공작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망한 루이의 아들 샤를(Charles Ier d'Orléans, Charles of Orléans)은 아르마냐크 백작의 딸과 결혼한 사이로 이제 나라는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냐크 파로 나뉘게 되었다.
1408년 부르고뉴 공작은 루이 공작의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폭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쳐 국왕의 사면을 받아냈다. 이후 그는 루이 공작이 부과했던 높은 세금을 줄이겠다는 공양과 함께 자신의 개혁의 기수로 포장하여 기존 행정부 관리를 숙청하고 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아르마냐크 파는 군대를 모아 베리 공작(샤를 5세의 살아있는 유일한 형제)과 함께 파리를 봉쇄하였다.
부르고뉴의 장은 헨리 4세에게 접촉하여 자신을 지원하면 잉글랜드 왕세자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잉글랜드가 플랑드르와 노르망디를 정복하는데 협조하겠다고 제안하였다. 1411년 10월 중기병 800명, 궁수 2,000명으로 구성된 잉글랜드 군이 칼레를 통해 프랑스로 들어왔고 이들은 장의 3,000명의 파리 민병대와 합세하여 아르마냐크 군대의 봉쇄를 무너뜨렸다.
곧 아르마냐크 파도 잉글랜드에 원조를 요청하여 1412년 5월, 석 달 동안 1,000명의 중기병, 3,000명의 궁수를 쓰는 대가로 1369년 경계를 기준으로 아키텐 전 지역을 궁극적으로 할양하고 기옌 지역 요새 스무 곳을 넘기겠다고 제안하였다. 8월 (헨리 4세의 둘째 아들) 클래런스 공작(Thomas of Lancaster, Duke of Clarence)이 군대를 이끌고 코탕탱을 통해 상륙했다.
클래런스의 군대는 루아르 강을 건너 야생 습지대 솔로뉴를 통과한 뒤 앵드로 계곡을 따라 이동했다. 이들은 보르도로 가는 과정에서 과거 그들이 했던 방식대로 슈보시를 자행하였고, 프랑스 왕족들은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주며 매수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 클래런스 군대의 슈보시를 기회삼아 칼레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인근의 발링험을 점령하여 잉글랜드 군의 거점을 하나 더 확보하였다.
이제는 부르고뉴의 장조차도 잉글랜드의 전면적인 침공 가능성에 불안해했다. 그는 방어 비용 마련을 위한 새로운 과세를 삼부회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장은 이들에 대해 보복하는 한편 아르마냐크 파 및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공포정치를 펼쳤다. 1413년 8월 부르고뉴 공작 장은 샤를 6세를 납치하려다 실패하자 파리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왕국에서 지냈다.
이렇게 프랑스는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냐크 파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1413년 3월 헨리 4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숨을 거두자 잉글랜드에선 새로운 국왕이 탄생하였다.
그는 바로 헨리 5(Henry V)세였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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