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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by The Raven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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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4)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2)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헨리 5세의 초상화

1413년 3월 헨리 4세의 아들이자 '곤트의 존'의 손자인 몬머스의 헨리(Henry of Monmouth)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자 시절 이미 국정 운영의 경험이 있어 웨일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버지 헨리 4세가 와병 중일 때는 국왕 자문회의의 의장으로 활동했다. 

책을 좋아했고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헨리 5세는 성직자와 같이 검약하면서 정중한 면이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기질이 있었다. 

웨일스 반란이 진압되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런던에 잡혀있어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자, 헨리 5세는 해협을 건너 프랑스를 침공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때마침 프랑스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대립으로 콩가루 집안이었다.

프랑스의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는 각자 잉글랜드로 사절단을 보내 헨리와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이 협상에서 헨리는 두 사절단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내걸었고 협상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서는 프랑스 사절단이 헨리의 요구에 대해 (도팽이 주는 선물이라며) 테니스공 세 개를 내놓았으나 실제 프랑스 사절단은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프랑스의 공주와 함께 일부 영토를 조건으로 제시했었다.

에드워드 3세의 경우처럼 헨리 5세도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비록 의회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찬성했지만, 그것만으로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는 한없이 모자랐으며 결국 돈을 빌리기 위해 잉글랜드 곳곳으로 국왕의 의원들이 파견되었다. 

헨리의 군대는 부대장에게 정해진 수 만큼의 중기병과 궁수를 고용하도록 위임한 '고용 계약 시스템'에 따라 모집되었다. 중기병들의 무장은 과거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투 때와는 달라져서 판금 갑옷이 사슬 갑옷을 점차 대체하였고 무기는 베거나 찌르는 무기보다는 철퇴나 전투용 망치 같이 때려 부수는 형태의 무기가 사용되었다. 이런 무기들은 한 손으로 휘드를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방패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무기들 (메이스와 워해머)

헨리는 8,000명의 궁수, 2,000명의 중기병을 모집했고 여기에  창기병과 검병, 그리고 65명의 포병으로 운용되는 포대가 추가되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보급에도 신경을 써서 대규모의 선박을 징발한 끝에 1,500척의 함대가 솔렌트에 집결했다.

 1415년 8월 11일에 출항한 헨리 5세의 대함대는 사흘 동안 해협을 건넌 끝에 프랑스 땅에 상륙했다. 그들은 예상과 달리 칼레가 아닌 아르플뢰르(Harfleur) 근처 셰프드코에 상륙하였고, 아르플뢰르를 교두보로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파리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플뢰르를 점령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아르플뢰르는 튼튼한 성벽에 스물여섯 개의 탑과 요새화 된 관문 및 해자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먼저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선박이 들어올 수 있는 하구를 감시하여 아르플뢰르로 증원군이나 보급품이 들어갈 수 없게 차단하였다. 

이어서 잉글랜드군은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서 성벽을 폭파시키려 했지만 프랑스군도 잉글랜드군의 땅굴에 맞서 갱도를 파는 바람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포대를 이용해 성벽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헨리 국왕은 종종 밤새도록 자지 않고 포격을 지시했으나 한 달이 지나도 이 작은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잉글랜드 진영에서는 이질과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돌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보급이 차단된 상태에서 포격을 당하는 아르플뢰르 수비대도 절박하긴 마찬가지였다. 수비대는 도팽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도움을 호소했지만, 도팽과 그의 자문관들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고, 결국 수비대는 9월 18일 항복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승리했지만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군사의 1/3이 전투 또는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군사들도 상당수 부상을 입었다. 자문관들은 잉글랜드로의 귀환을 왕에게 제안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10월 6일 아르플뢰르를 떠나 칼레로 행군을 시작했다. 

헨리 국왕과 글로스터 공작이 본대를 지휘하고 존 콘월경은 전위를 요그 공작과 옥스퍼드 백작은 후위를 맞았다. 그들은 포대와 보급 수레를 버리고 8일치 식량만 챙겨갔다. 헨리는 북동쪽으로 행군한 후 솜 강에 도달하면 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칼레로 향할 생각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방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팽의 군대는 잉글랜드의 이동을 중간에 차단하기위해 병력을 모으며 잉글랜드군의 뒤를 쫓고 있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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