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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4)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2)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1415년 10월 29일, 굶주리고 비에 흠뻑 젖은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도착했다. 헨리 국왕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일부 병사는 칼레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거부당했으며,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의 술과 음식 때문에 병사들은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과 포로를 모조리 털리고 말았다.
11월 중순 더이상의 전역(campaign)을 이끌어 가기에는 병사들이 너무 지쳐있었다. 결국 헨리 국왕은 잉글랜드로 출항하여 11월 23일에 런던에 입성하였다. 아쟁쿠르에서의 승리는 잉글랜드 국민들을 도취시켜 그 후 몇 년동안은 군비를 마련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헨리 국왕은 이번 전역에서 얻은 아르플뢰르에 상인과 장인들을 정착시켜 이곳을 노르망디의 칼레로 만들려고 하였다.
141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에 방문하였다.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화평을 주선하기 위해 왔지만, 그와 별도로 헨리와 상호 원조, 동맹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 모습에 인상을 받은 부르고뉴의 장 공작도 잉글랜드 편에 서기로 결심하였다. 공작은 헨리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샤를 6세를 폐위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1417년 7월, 1만 명의 잉글랜드군이 약 1,500척의 배에 나눠 타서 영국 해협을 건넜다. 8월 1일 잉글랜드군은 도빌(Deauville)과 트루빌(Trouville) 사이의 투크강(Touques river) 어귀에 상륙하였다. 프랑스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가 내전을 벌이느라 헨리의 군대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8월 18일 헨리는 캉(Caen)을 포위하였다. 잉글랜드군은 먼저 근교의 두 수도원을 점령하고 수도원의 높은 탑에 대포를 설치해 캉의 성벽을 두들겼다. 성벽 여기저기에 구멍이 생기고 헨리 국왕은 캉의 수비대에 항복을 권했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9월 4일, 헨리는 성의 동쪽 측면에서 공격을 이끌었고, 동시에 동생 클래런스는 서쪽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클래런스와 워릭 백작이 강 쪽 성벽을 넘어 들어가 헨리의 부대쪽으로 길을 내어 승리를 이끌었다. 승리한 잉글랜드군은 주민들을 장터로 몰아넣은 다음 도륙하여 최소 2,000명을 죽였다. 장터에서의 학살을 피한 사람들도 약탈과 강간을 피할 순 없었다.
결국 2주 후 성채 수비대가 항복했다. 캉이 떨어진 후, 바이외(Bayeux)는 거의 아무런 저항없이 항복했다. 10월에는 아르장탕(Argentan)과 알랑송(Alençon)이 1418년 2월에는 팔레즈(Falaise) 요새가 항복하였다. 봄이 되자 노르망디 남부 전체와 코탕탱(Cotentin), 에브뢰(Évreux)에서 셰르부르(Cherbourg)까지 모두 점령되었다. 6월에는 루비에르가 7월 20일에는 퐁드라르슈가 함락되었다.
1418년 7월 29일, 잉글랜드군은 루앙(Rouen)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루앙은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로 도시 성벽이 8킬로미터에 걸쳐 뻗어있었고 6개의 외보와 60개의 탑이 있었다. 이 곳은 기 르 부테이(Guy Le Bouteiller) 휘하 4,000명의 중기병이 지키고 있었고 성 안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피난민과 주민이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도시의 사면을 참호로 연결된 진을 치고 물길을 막아 도시를 완전히 봉쇄하였다. 잉글랜드군은 런던과 센강 상류로부터 보급을 받으며 적이 항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루앙의 수비대와 민간인들은 부르고뉴 또는 아르마냐크파로부터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연말이 되자 성 안에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고, 매일 많은 사람들이 죽어 다 묻을 수가 없었다. 결국 수비대는 도시의 가난한 주민 1만 2,000명을 성 밖으로 쫓아냈다. 하지만, 헨리는 이들이 받아주지도 지나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그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받으며 비참하게 죽어갔다.
1419년 새해가 되자 루앙의 사절단이 협상을 위해 잉글랜드 진영을 찾았다. 협상 결과 1월 19일까지 루앙을 구원하기 위한 군대가 오지 않으면 수비대는 항복하기로 하였다. 결국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도시는 항복하였다.
루앙이 함락된 후, 헨리는 두 달동안 이 곳에 머무르며 도시의 시설을 보수하고 행정조직을 꾸리며 다음 전역을 준비하였다. 그 사이 그의 부대장들은 노르망디의 다른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노르망디 전역을 장악하였다.
1419년 7월 퐁투아즈(Pontoise)가 헨리의 손에 떨어지면서 이제 파리의 코앞까지 잉글랜드군이 도달하였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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