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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4)

by The Raven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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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3)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정복 후 소수의 현지 귀족은 플랜태저넷 왕가에 복속했지만, 대다수 귀족의 영지는 몰수되어 잉글랜드인에게 넘겨졌다. 

노르망디로 넘어온 잉글랜드 귀족과 군 지휘관들에게는 성과 장원이 주어졌다. 1만 명의 잉글랜드인이 아르플뢰르에 정착하였고 많은 노르망디 도시에 잉글랜드인이 정착하여 현지 여성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대대적인 규모의 식민화는 인구가 적은 15세기 잉글랜드의 국가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노르망디에 들어온 새로운 잉글랜드 영주들은 세금, 배상금, 안전 통행권(파티스)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철저히 뽑아냈다. 

노르망디 정복으로 잉글랜드는 센강 하류의 식량 이송로를 통제함으로써 파리를 압박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보르도와의 연락망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잉글랜드 남부 해안 지역을 침공의 위협에서 보호하는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헨리 5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샤를 국왕은 더욱 심하게 미쳐 잉글랜드에 대항할 수 없었다. 

두 명의 도팽은 일찍 요절하였고, 1403년에 태어난 (훗날 샤를 7세가 되는) 세 번째 도팽은 미덥지 못한 인물이었다. 

잉글랜드의 진군에 경악한 부르고뉴 공작 장은 아르마냐크파와 협상을 시도하였고, 1419년 여름 코르베유에서 열린 예비 회담에서 장 공작과 도팽, 아르마냐크파 자문들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듯했다. 

하지만 사실 아르마냐크파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고, 9월 10일 욘강 몽트로(Montereau) 다리에서 열린 두 번째 회담에서 부르고뉴 공작이 도팽에게 예를 표하는 순간 그를 참살하였다. 

암살당하는 부르고뉴 공작 장

부르고뉴 공작의 피살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사이의 불화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아르마냐크파는 이 일로 프랑스인들의 큰 반감을 사 세력이 더욱 약해졌고 아르마냐크파의 꼭두각시로 알려진 도팽도 비난을 같이 받아야 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은 완연히 민족적 투쟁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심지어 잉글랜드 국왕의 제1언어도 이제는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였다. 

부르고뉴의 새로운 공작 선량공 필리프 3세는 부르고뉴와 잉글랜드가 프랑스 북부를 분할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1419년 12월 그는 헨리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고 헨리의 프랑스 정복을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장 1세에 이어 부르고뉴의 공작이 된 필리프 3세

1420년 5월 20일 헨리 5세는 동생 클래런스와 1,500명의 병력만을 이끌고 샹파뉴 지방의 트루아에 도착했다.

병세가 심한 샤를 6세는 잉글랜드 국왕과의 조약에 순순히 응하였다. 헨리는 샤를의 딸 카트린과 12일 이내에 결혼식을 올기로 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팽과 아르마냐크파가 점령하고 있는 모든 영토를 정복하기로 약속했다. 

헨리는 샤를 6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노르망디를 정복하고 나중에 프랑스 국왕이 되면 노르망디 공국과 프랑스 왕국을 통합하기로 했다. 이 기쁜 소식이 잉글랜드로 전해지자 잉글랜드 세인트폴 대성당에서는 감사의 행렬 기도식이 거행되었다.

트루아 조약은 프랑스 역사상 최대 굴욕 중 하나로 1940년 나치에게 겪은 굴욕에 비견된다. 

트루아 조약 비준

잉글랜드, 부르고뉴 동맹군은 노르망디와 파리 사이의 산재한 적의 주요 저항 거점을 공략하는 새로운 전역을 개시하였다.

먼저 필리프의 아버지 장 공작이 살해된 몽트로를 함락한 연합군은 7월에 믈룅(Melun)을 포위하였다.

가스코뉴인 지휘관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장와 700명의 수비대가 믈룅을 처절하게 방어했으나 결국 18주간의 저항 끝에 믈룅은 11월에 항복하였다.

1420년 9월 1일, 헨리 5세, 부르고뉴의 필리프, 샤를 6세가 파리에 입성하면서 15년간의 잉글랜드의 파리 점령이 시작되었다. 

트루아 조약이 비준된 후, 헨리는 루브르 궁전에서 화려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낸 반면, 이젠 뒷방 늙은이가 된 샤를은 오텔드생폴의 낡은 궁전에서 버림받은 채 초라한 대우를 받았다. 

이 시기 파리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고 식량 가격은 두 배로 뛰어 파리 시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큰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쓰레기장은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뒤지다 죽은 아이들의 시신으로 뒤덮였고, 센강 주변에는 늑대들이 매장된 시신을 파먹는 일도 있었다. 

헨리와 카트린 왕비는 파리를 떠나 루앙에서 공현절(Epiphany)을 보내고 1월 말, 칼레로 이동하여 도버로 떠났다. 

3년 반 만에 잉글랜드에 돌아온 국왕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1421년 2월 23일 캔터베리 대주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카트린 왕비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카트린 왕비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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