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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5)

by The Raven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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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4)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대관식이 끝난 후 국왕 부부는 잉글랜드 각지를 방문하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거둬들이기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국왕이 다녀간 후에는 위임관들이 종교인,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쟁 자금을 모금하러 다녔는데, 5월 초가 되자 융자금의 규모가 3만 8,000파운드에 달하였다. 이 중 2만 2,000파운드는 국왕의 삼촌 보퍼트 주교가 댄 것이었다. 

곤트의 존과  보퍼트가(家)의 캐서린 스위프트 사이에서 태어난 보퍼트 주교 (헨리 보퍼트)

의회는 잉글랜드 국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거론하면서도 전쟁에 필요한 추가 보조금을 승인했다.

1421년 4월, 잉글랜드 왕위 후계자이자 국왕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Thomas of Lancaster, Duke of Clarence)이 전투가 패해 사망했다. 

클래런스는 노련한 군인이었으나 충동적인 기질이 있었는데, 1421년 3월 22일 부활절 주일에 노르망디의 퐁드라르슈에서 만찬을 들던 중 인근의 보제(Baugé)에 아르마냐크 군대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길버트 엄프러빌 경과 헌팅던 백작은 클래런스에게 궁수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언했으나 그는 이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1,500명이 채 안 되는 병력만을 이끌고 15킬로미터를 질주해 보제로 갔다.

쿠에농강 다리를 건넌 공작은 적의 수가 자신의 부대보다 두 배나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질퍽거리는 땅을 건너 오르막을 올라 적에게 돌진하였다.

스코틀랜드 병력이 포함된 아르마냐크파 군대는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며 잉글랜드군을 향해 돌격하였다.

투구에 쓴 보관으로 인해 쉽게 적에게 식별될 수 있었던 클래런스는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고, 그의 부하들 대부분도 그와 함께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보제 전투 (Battle of Baugé) 삽화

이 패전은 잉글랜드인들이 궁수와 말에서 내린 중기병 조합에 의존해야 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아르마냐크파는 이 승리에 한껏 고무되었다. 비록 이 한 번의 승리로 인한 전략적인 이점은 없었으나 적어도 잉글랜드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1421년 6월 헨리는 프랑스로 복귀하였다. 그는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행군했다. 파리는 북쪽으로 드뢰(Dreux), 동쪽에는 모(Meaux), 남쪽에는 주아니에 진을 친 아르마냐크 군대에 의해 삼면이 포위된 상태였다. 

국왕은 먼저 드뢰를 포위하여 함락시킨 후 남쪽으로 행군하여 방돔(Vendôme)과 보장시를 함락시키고 오를레앙(Orléans) 앞에 진을 쳤다. 

잉글랜드군은 요새화된 도시를 포위하기에는 보급품이 부족했기 때문에 북쪽으로 선회하여 빌뇌브르루아(Villeneuve-le-Roi)를 함락하였다. 이후 헨리의 군대는 모로 이동하였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6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는 삼면이 강으로 방어되고 나머지 한 면은 운하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폭우로 인해 강과 운하는 물이 크게 불어나 있었다. 

파리 동쪽 모(Meaux)의 위치 (구글 맵)

헨리의 군대는 10월에 포위를 시작하여 진을 치고 대포와 보급품을 가져왔다. 바스타르 드 보뤼스 휘하의 방어군은 기아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텼다. 

비와 홍수로 침수되었던 성벽 밖의 땅에는 서리가 내렸고 평소보다 질병이 자주 발병했다. 

잉글랜드군의 1/6이 이질과 천연두로 죽은 것으로 보였고 헨리도 병에 걸렸다. 추위와 질병 속에서도 헨리는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전장에 있었던 1421년 12월 6일, 윈저성에서는 카트린 왕비가 헨리 5세의 아들이자 왕위 후계자인 헨리 6세를 출산하였다. 

헨리 5세가 1421년 크리스마스를 보낸 생파롱 수도원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해를 넘겨 1442년 3월 9일 수비대를 제외한 도시민들이 항복했고, 5월 10일 결국 수비대로 항복하였다. 바스타르는 참수되었다. 

헨리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모 포위전에서 얻은 병으로 이질 증상을 보였다. 아르마냐크파에 포위된 디종으로 가는 도중 그는 갑자기 말을 탈 수 없게 되었고, 가마에 실려 8월 10일 뱅센(Vincennes)성으로 이동하였다. 

헨리 5세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동생 베드퍼드(John, Duke of Bedford)를 프랑스의 임시 섭정이자 아직 갓난 아기인 헨리 6세의 후견인으로 임명하는 한편, 글로스터(Humphrey, Duke of Gloucester)를 잉글랜드의 섭정으로 삼았다. 

그는 베드퍼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할 것과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작이 사양할 때만 프랑스의 섭정 지위를 유지할 것을 주문하였다. 

또 만일 상황이 나빠지면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구하는 데 집중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헨리 5세는 1422년 8월 31일 뱅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고작 서른다섯이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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