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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2)

by The Raven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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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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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2)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4)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5)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1)

노르망디에서 나오는 세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앵글로-부르고뉴 프랑스 이중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르고뉴파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다루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성격이 난폭하고 거만하면서 변덕스러운 면이 있었다. 또한 플랜테저넷이 다스리는 프랑스를 진심으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는 가터 기사가 되길 사양하였고 잉글랜드 형제들에 대한 충성 신서를 거절하였다. 베드퍼드는 그와 사이좋게 지내가 위해 갖은 애를 썼다.

1423년 4월, 베드퍼드와 부르고뉴, 브르타뉴 공작은 아미앵(Amiens)에서 만나 도팽의 타도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1423년 동맹군은 르크로투아(Le Crotoy)를 손에 넣고 도팽파의 포통드 쟁트라유를 패주시켰다. 부르고뉴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서는 잉글랜드인과 기옌인들이 기옌 국경지역에서 습격과 반격을 반복하며 도팽파와의 전투를 이어갔다.

1423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투로는 크라방 전투(Battle of Cravant)를 꼽을 수 있다. 도팽파는 이 전투를 위해 단리의 존 스튜어트(John Stewart) 경이 이끄는 대규모 스코틀랜드군과 이탈리아, 에스파냐의 용병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부르고뉴 공국 국경 지대의 핵심 지역인 욘(Yonne)의 우안에 있는 소도시 크라방(Cravant)로 진군하였다. 솔즈베리 백작인 크라방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빠르게 행군하였고, 부르고뉴군도 오세르(Auxerre)에서 합류하였다.

7월 29일 금요일 솔즈베리가 크라방에 다다랐을 때 도팽파는 도시에서 2.5킬로비터 정도 떨어진 강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크라방 전투 전장도 (출처: britishbattles.com)

솔즈베리 입장에서 강을 건너 도팽파를 공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지만, 자신들이 공격 받으면 도시에 있던 수비대가 구원을 올 꺼라 믿고 궁수들의 엄호 속에 도하를 시도하였다. 

무사히 강을 건넌 솔즈베리의 부대는 도팽파와의 전투에 들어갔고,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넌 윌러비 경의 부대도 도팽파의 열렬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크라방의 수비대는 비록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허약해졌지만, 솔즈베리의 바람대로 뒤에서 도팽파를 쳤다. 도시와 강둑 양쪽에서 공격을 받은 도팽파는 뿔뿔히 흩어졌고 다수의 스코틀랜드 인을 포함하여 1,200명이 이 전투에서 학살되었다. 존 스튜어트 경은 한쪽 눈을 잃은 채 생포되었다. 

1424년, 베드퍼드는 1만 명의 군사를 모았고 서퍽 백작을 파견하여 도팽파에 함락된 이브리(Évry)를 탈환하게 했다. 서퍽은 도시를 빠르게 탈환했지만, 수비대는 도팽의 구원군이 오길 기다리며 성채에서 버텼다.

그러나 도팽의 군대가 오기 전에 버드퍼드의 본진이 이브리에 먼저 도착했고 결국 성채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8월 14일, 도팽과 스코틀랜드의 군대는 잉글랜드 수중에 있던 노르망디 국경 도시 베르뇌유(Verneuil)를 향했다.

도팽 군대는 스코틀랜드군을 포로로 위장해 이들을 말꼬리에 묶은 채 베르뇌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습을 본 베르뇌유 도시 주민들은 스코틀랜드인을 잉글랜드군 포로로 착각했고, 베드퍼드가 전투에서 졌다고 생각해 얼른 성문을 열었다.

그사이 이브리를 떠나 에브뢰로 향하던 베드퍼드는 베르뇌유가 도팽파에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베르뇌유로 향하였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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