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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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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2)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4)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2)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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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5)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1)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2)
1424년 8월 17일, 베드퍼드는 9,000명의 군사와 함께 베르뇌유(Verneuil) 시 앞의 평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중기병을 중앙에, 궁수를 양익에 두는 등 기존의 잉글랜드군이 푸아티에와 아쟁쿠르에서 썼던 대형을 동일하게 운용하였다.
중기병은 두 개의 전투대형으로 나누어 베드퍼드와 솔즈베리가 각각 맡았고 2,000명의 말 탄 궁수가 예비 병력으로 짐수레와 함께 400미터 후방에 배치되었다.
도팽의 군대는 베르뇌유로 가는 길 아래쪽에 있었는데, 말에서 내린 중기병 1만 7,000명이 둘로 나뉘어 궁수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양익은 잉글랜드의 궁수들의 측면 공격을 상대하기 위해 말을 탄 중기병들이 배치되었다.
양측은 새벽부터 오후 네 시까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대치한 채 어느 쪽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베드퍼드가 부대 전진을 지시하였고, 잉글랜드군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말에 탄 도팽파의 일부 중기병들이 베드퍼드 우익의 궁수들을 향해 돌격하다 예비 궁수 병력 앞에서 멈춰섰다. 많은 잉글랜드 병사들이 도망쳤으나 양측은 계속 전진했고, 곧이어 잉글랜드군과 도팽파군 사이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두 군대는 약 45분 간 치열하게 싸웠고 특히 베드퍼드 섭정은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무시무시한 솜씨로 많은 적군을 죽였다. 마침내 도팽군이 흔들리더니 물러나기 시작했고 베르뇌유 성의 혜자로 몰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좌익에서는 솔즈베리가 스코틀랜드군에 제압될 뻔하였다. 거기에 600명의 이탈리아 기병이 솔즈베리를 휩쓸고 짐수레까지 약탈하였다. 예비 궁수 병력은 우익을 돌파해 들어오는 도팽파 중기병을 가까스로 격퇴한 후, 짐수레 쪽으로 와서 이탈리아 기병들도 물리쳤다.
이어 이들은 솔즈베리를 돕기 위해 스코틀랜드군의 측면을 쳤다. 그 사이 베드퍼드는 분대를 재집결하고 스코틀랜드군의 후위를 쳐서 그들을 제압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전투 초반에 거의 질뻔 한 순간도 있었고 많은 잉글랜드군이 도망을 쳤지만, 결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로 도팽파 군대의 사상자 수는 7,000명이 넘었으나 잉글랜드군은 1,000명밖에 잃지 않았다.
이 전투로 베드퍼드 섭정의 위신은 하늘을 찔렀고, 도팽파의 전투력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섭정은 앙주와 멘의 정복을 위해 적의 거점을 하나씩 축소시켜갔다.
하지만, 베르뇌유 전투의 승리로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섭정에게 뜻하지 않은 악재가 나타났다. 바로 글로스터의 험프리(Humphrey of Gloucester)가 저지대 지역의 여백작 에노의 자클린(Jacqueline of Hainault)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글로스터는 자클린과 결혼한 후 스스로를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의 백작이라 칭하고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 곳을 침공하였다. 하지만, 이 원정은 웃음거리가 되었고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평소 자클린의 영토를 탐내던 부르고뉴의 필리프는 격분하였고, 1424년 가을, 파리를 방문한 필리프는 베드퍼드에게 모욕적인 말과 함께 자신이 도팽과 방어조약을 맺은 것을 알렸다. 여기에 더하여 필리프는 당시 19살이었던 솔즈베리 백작부인에게 접근하여 솔즈베리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1425년, 이번에는 글로스터가 잉글랜드 국내에서 더 큰 말썽을 일으켰다. 그는 당시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정부인 보퍼트 자문회의와 대립하여 거의 내전을 벌이다시피 하였다. 보퍼트는 급하게 베드퍼드에서 귀국할 것을 간청하였고, 결국 베드퍼드는 동생과 삼촌을 화해 시키기 위해 1425년 12월부터 1427년 3월까지 프랑스를 떠나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베드퍼드는 화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으나 이 기간 동안 해협 너머의 사안에 대해서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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