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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5)

by The Raven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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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 1  2  3  4 


8월 중반부터 공세를 시작한 솔즈베리 백작은 오를레앙에서 인접한 루아르강 변의 도시들을 포함하여 40군데가 넘는 도시 및 요새를 손에 넣었다.

10월 12일, 백작은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루아르 강 북안에 위치한 이 도시는 9미터 높이의 성벽으로 길게 둘러싸여 있었고, 성 안의 방어군의 수도 공성군보다 더 많았다. 

오를레앙은 방어하는 고쿠르 영주는 휘하에 2,400명의 병사와 3,000명의 민병대를 보유하였고, 총 71문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는 반면, 잉글랜드군의 수는 4,000명 정도에 불과했고 더군다나 최정예 병사들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솔즈베리 백작은 강을 가로지르는 주(主)다리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350미터 길이의 이 다리는 강둑에 쌓은 토루와 투렐(Tourelles)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탑으로 보호 받고 있었다.

비록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망루 수비대는 잉글랜드군이 망루 아래 갱도를 뚫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들 뒤에 있는 다리의 두 아치를 무너뜨린 후 도망쳐 버렸다.

백작은 오를레앙을 더 가까이서 살펴보기 위해 투렐의 3층까지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때 성벽의 붐바르드포가 발사되었고, 포에서 발사된 돌은 창문으로 날아와 백작이 피격되면서 그의 얼굴 절반이 잘려나갔다.

오를레앙 전투 (솔즈베리 백작의 치명적인 부상을 입다.)

솔즈베르 백작은 1주일간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지휘관들에게 포위전을 계속할 것을 당부하고 10월 27일 묑에서 사망하였다.
 

솔즈베리가 사망한 후 지휘권은 서퍽 백작에게 넘어갔다. 서퍽 백작은 많은 전역을 경험한 베테랑이지만, 솔즈베리와 달라 위험을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그럭저럭 포위전을 이어가던 서퍽과 나머지 병사들은 겨울이 다가오자 글러스데일 휘하의 수비대만 남겨두고 인근의 소도시로 이동했다. 그러나 12월 1일 톨벗 경과 스케일스 경은 그들을 다시 복귀시켜 바스티유라는 이름의 말뚝 박은 토루 60개를 이용해 도시를 에워쌌다.

하지만, 봉쇄는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도시 안에는 식량이 풍부했고 500명의 원군도 도착했다. 

1429년 봄이 되었지만, 잉글랜드군은 여전히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4월, 베드퍼드 섭정은 더 많은 병력을 자문회의에 요청했지만, 고작 100명의 중기병만을 받았다. 

한편 도팽파는 오를레앙 공작이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다는 구실을 들어 오를레앙을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하는 영리한 외교 수단을 구사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섭정은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필리프는 부르고뉴 병사들을 포위전에서 철수시켰다. 

4월 29일 잉글랜드군이 토루에서 펼쳐진 양동 작전에 주의를 빼앗긴 사이 오를레앙에서 상류로 8킬로미터 떨어진 셰지에서 바지선들이 도시로 도착했다. 

그 다음날, 소규모의 호위대를 동반한 구원군의 지도자가 검은 군마를 타고 작은 전투용 도끼를 든채 오를레앙으로 입성했다.

잔 다르크였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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