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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오를레앙의 마녀 - 1429~1435 2)

by The Raven 2023. 9. 24.

'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 1  2 

*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 1  2  3 

*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 1  2  3  4 

*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 1  2 

*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 1 

*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오를레앙의 마녀 - 1429~1435) - 1 


오를레앙에 입성한 잔 다르크는 며칠 만에 잉글랜드의 주요 토루를 점령하고 글러스데일을 비롯한 수비대를 죽인 후 투렐을 재탈환했다. 90일간 지속되었던 공성전 끝에 서퍽 백작은 결국 포위를 풀었다.

서퍽은 자르조(Jargeau)로 이동하여 톨벗 경과 스케일스 경에게 나머지 병사를 맡기는 등 질서정연한 퇴각을 하였다. 

도팽파의 사기는 충천했고, 알랑송의 군대는 루아르강 변의 잉글랜드 요새로 출발했다. 6월 12일 이들은 자르조를 강습하여 서퍽을 생포하고 그의 수비대를 격파했다. 

도팽파의 진격으로 보장시(Beaugency)의 잉글랜드군은 내성으로 피해야만 했고, 톨벗 경은 보장시 수비대를 구원하기로 결심했다. 도팽파의 병력은 8,000명인데 비해 톨벗과 존 파스톨프 경의 병력은 3,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파스톨프는 하루 이틀이면 도착할 신병을 기다리며 잠시 물러나 있고 싶었지만, 톨벗은 행군을 고집했다.

6월 18일, 보장시 내성이 항복하고 잉글랜드 병사들이 파테(Patay) 마을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잔은 도팽파 지휘관들을 독려하여 추격을 명했다. 프랑스 정찰대는 잉글랜드 군을 찾지 못하다가 사슴 한 마리가 숲에서 뛰쳐나와 잉글랜드 장국병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사슴에 등장에 놀란 궁병들은 비명을 질렸고, 프랑스군은 적이 숨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톨벗은 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파테 남쪽에 궁수들을 배치하고 파스톨프는 톨벗의 뒤쪽에 민병대를 배치했다. 

하지만, 말뚝을 박고 있던 톨벗의 궁수들 측면으로 도팽파 중기병들이 갑자기 나타나 궁수들을 강타하여 섬멸하였다. 그리고 궁수들이 제압되는 모습을 본 파스톨프의 병사들은 줄행랑을 쳤다.

파테 전투 삽화 (작가 미상, 1484년)

결국 톨벗 경과 스케일스 경은 생포되었고, 파스톨프는 가까스로 도망쳤다. 파스톨프는 이튿날 코르베유에 도착하여 섭정에게 패전 사실을 보고해야 했다.

파테 전투 소식을 들은 섭정은 노발대발하여 파스톨프의 가터 훈장을 떼어갔다. 

이제 잔의 명성을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파리로 진군하는 대신 도팽에게 랭스로 가서 대관식을 치르자고 설득했다. 랭스로 간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샤를 7세의 대관식과 그의 옆에서 흰 기를 들고 서 있는 잔 다르크

'샤를 7세'의 대관식은 도팽파의 사기를 놀라울 정도로 진작시켰다. 잔이 용기를 북돋은 대상이 궁정의 기사들에게 국한되었는지 농민 대 농민으로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잔과 함께 전투를 치르며 많은 프랑스인들은 스스로 성전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했고, 잉글랜드인들은 잔과 잔의 마법에 겁을 먹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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