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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by The Raven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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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프랑스군은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을 쫓으면서 점점 몸집을 불려갔다. 오를레앙 공작, 부르봉 공작, 알랑송 공작, 브르타뉴 공작의 부대가 더해졌고 거기에 부르고뉴 공작의 동생들인 브라방 공작과 네베르 백작까지 차례차례 합류하였다.

도팽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모두 화려한 중기병을 이끌고 왔다. 잉글랜드군이 지나는 마을은 온통 불길에 휩싸였으므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처음에 자신들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솜강을 따라 나 있는 얕은 여울들이 프랑스군에 의해 막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10월 19일 헨리의 군대는 겨우 강을 건넜다. 10월 20일에는 프랑스 측 전령이 헨리의 막사로 찾아와 헨리의 군대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복수할 것이라고 전했고, 헨리는 '만사가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답한 후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칼레로 행군할 것음을 밝혔다.

다음 날 잉글랜드군은 악천후 속에서 행군을 계속했다. 별다른 사건없이 행군을 계속하던 중, 10월 24일 요크 공작의 정찰병이 "무수한 메뚜기떼"처럼 진군하는 프랑스군을 발견했다. 

잉글랜드군은 근처의 메종셀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동했다. 이제 잉글랜드군은 6,000명이 채 안 되어 5,000명의 궁수와 800명 정도의 중기병만 있었다. 이 중 다수가 이질로 고생하고 있었고 연이은 행군과 영양 부족으로 쇠약한 상태였다. 

아쟁쿠르 전투의 아침 (1884년 John Gilbert작)

1415년 10월 25일, 성 크리스틴의 날(St. Crispin's Day) 새벽이 되었을 때 양 군은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며칠동안 내린 비로 땅은 미끌미끌한 진흙탕이었고 어떤 곳은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다. 잉글랜드군이 질병과 굶주림, 피로에 허덕이던 것과 반대로, 프랑스군은 이미 승리를 한듯 자신감이 넘쳤다. 

잉글랜드군의 중앙은 헨리 국왕이 지휘했고 우측은 요크 공작이, 좌측은 가터 기사 카모이스 경이 맡았다. 셋으로 나누어진 대형 사이에는 궁수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예비 병력은 없었다.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진영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위치 선정이 영 좋지 않았다. 진입로가 너무 좁을 뿐 아니라 쟁기질이 된 전방의 밭은 완전히 갈아엎어져 있었다. 프랑스 진영은 말에서 내린 중기병들이 두 줄로 서있었고 그 뒤와 양 옆에는 말에 올라탄 중기병들이 있었다. 포대도 양익에 있었지만, 중기병들이 우왕좌왕하다보니 운용이 여의치 않았다. 

프랑스군(파란색)와 잉글랜드군(붉은색)의 배치

부시코 원수와 달브레 총 사령관이 명복상의 프랑스군 지휘관이었지만, 제대로된 지휘 체계나 리더쉽은 찾아볼 수 없었다. 

헨리 국왕은 미사를 세 번 올린 후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연설을 하였다. 잉글랜드군은 궁수의 사정거리 안으로 프랑스군은 스스로 들어오길 바랬지만, 프랑스군은 몇 시간동안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헨리는 아홉 시쯤 토머스 어핑엄 경에게 양익의 궁수들을 적의 사정거리 안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궁수들이 이동하면서 나머지 병사들도 천천히 전진하였다. 적군과의 거리가 270미터가 채 되지 않은 지점에 멈춰선 궁수들은 뾰족하게 깍은 말뚝을 땅에 박은 뒤 활을 쏘기 시작했다.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에 프랑스군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프랑스군 양익에서 말에 타고 있던 중기병들이 잉글랜드 궁수들에게 돌진했으나 화살에 맞은 말들은 통제불능에 빠졌고, 가까스로 잉글랜드군 앞까지 도달한 말들도 1.8미터 높이의 말뚝에 막히고 말았다. 

이어서 프랑스군의 중기병 제1선이 잉글랜드 진영으로 걸어서 전진했다. 이번에도 잉글랜드 진영의 양쪽 날개에 있던 궁수들이 이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 많은 사상자가 났다. 지휘 체계가 없는 무질서한 상태가 되었지만 기어이 프랑스군 제1선은 잉글랜드 중기병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 전투가 벌어졌다. 

이들은 잉글랜드 중기병을 강하게 밀어내며 잉글랜드 전선을 무너뜨릴 뻔했다. 헨리 국왕은 재빨리 궁수들에게 즉시 활을 버리고 중기병들을 도우러 가라고 지시했다. 이에 잉글랜드 궁수들은 칼, 손도끼 등을 여타 무기를 집어들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진흙탕이 된 전장은 육중한 갑옷을 입은 프랑스 병사들에게 불리했다. 잉글랜드군은 갑옷의 접합 부위를 찌르거나 이들을 쓰러 넘어뜨렸다. 넘어진 프랑스 병사들은 일어나지 못한 채 진흙탕에서 허우적대다 익사하거나 잉글랜드군에 죽임을 당했다. 다른 일부는 자기의 몸 위로 다른 동료가 넘어지면서 압사하기도 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헨리 5세 (1915년 Harry Payne작)

프랑스군 중기병 2선도 똑같이 무질서하게 잉글랜드 진영으로 접근해왔고, 프랑스군 시체 위에 서 있던 잉글랜드군에게 같은 방식으로 제압되었다. 제2선의 지휘관 알랑송 공작과 브라방 공작이 전사했고 프랑스군 제1선과 제2선은 그렇게 전멸했다. 곳곳에서 프랑스군의 시체가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쌓였고 잉글랜드군은 전리품을 모으면서 값나가는 포로를 찾기위해 시체 더미를 뒤졌다. 

헨리 국왕과 다른 지휘관들은 프랑스의 추가적인 공격에 대비해 병사들을 원위치로 복귀시켰다. 적의 3차 공격을 기다리던 와중에 프랑스군에게 증원군이 도착했다는 외침이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후방의 보급 수레가 습격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헨리 국왕은 지위가 아주 높은 자를 제외한 모든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군 포로들은 끔찍한 방식으로 도륙되었다. 한 무리의 포로들은 오두막에 갇혀있다 오두막과 함께 불태워졌다. 헨리 국왕의 이와 같은 결정은 당시 중세의 기준으로 볼때도 매우 비열한 잔학 행위(슈렉클리히카이트, Schrecklichkeit)였다. 

결국 3차 공격은 없었다. 여전히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잉글랜드군을 압도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살육에 질려버린 프랑스 중기병들은 말을 달려 전장을 떠났다. 프랑스는 약 1만 명의 병사을 잃었는데 여기에는 달브레 총사령관을 포함한 대귀족, 여섯 명의 백작, 120명의 남작, 1,500명의 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의 인명 피해는 300명 정도였다. 그 중에 이름있는 자는 국왕의 당숙 요크 공작과 서퍽 백작 정도였다. 다만, 잉글랜드군도 많은 수가 부상을 입었고 특히 헨리 국왕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이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날 밤 잉글랜드 병사들은 프랑스 사상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몸값을 받을만한 자가 있는지 확인하였다. 몸값을 받을 만하거나 걸을 수 있는 자들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가난하거나 큰 부상을 입은 자들은 모두 목이 그어졌다. 다음 날 전리품을 챙긴 잉글랜드인들은 1,500명의 포로를 끌고 칼레로 향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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