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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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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4)
138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새로운 국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둘 다 미성년자였다.
1367년 보르도에서 태어난 리처드 2세(Richard II)는 강박적이고 고압적인 성격의 인물이었고, 리처드보다 한 살 어린 샤를 6세(Charles VI)는 향락을 즐기고 정신병적인 기질이 있었다.
두 군주의 주위에는 탐욕스럽고 독단적인 숙부들이 즐비했는데 잉글랜드에는 엄청난 부와 막강한 힘을 가진 곤트의 존(John of Gaunt), 비교적 존재감이 없고 소심했던 케임브리지 백작(Edmund of Langley), 그리고 훗날 글로스터 공작이 되는 버킹엄 백작인 우드스톡의 토머스(Thomas of Woodstock)가 있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에 관심이 많았던 앙주 공작, 부르고뉴의 대담공(the Bold of Burgundy) 필리프 2세, 그리고 예술 후원에 푹 빠져 있던 베리 공작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가 기옌과 바다를 통해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리처드 2세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잉글랜드의 남해안을 습격하는 프랑스-카스티야 연합 함대에 맞설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칼레, 셰르부르, 브레스트, 바욘과 같은 프랑스 해안지대에 감시 망루로써 잉글랜드 수비대를 주둔시켜야 했고 이들 요새를 유지하기 위해선 추가적인 세금이 필요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의회는 극빈자를 제외한 왕국의 모든 사람에게 인두세를 부과하는 데에 동의하였으나 안 그래도 생활이 어려웠던 농노들은 추가적인 과세에 항의하여 잉글랜드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흑사병의 영향으로 인구가 급감하여 농노의 노동력은 시장성이 있었으나 아직은 영주의 장원에서 벗어나는 것이 허락되진 않았다.)
반란군은 런던까지 진군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재상이었던 세인트존 기사단 수도원장의 목을 치는 등 맹렬한 기세로 국왕을 압박하였으나 이들의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Wat Tyler)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경(Sir William Walworth)에게 살해당하자 곧 와해되고 말았다.
과세는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야기했다. 앙주 공작은 나폴리로 떠나기 전, 샤를 5세가 폐지했던 세금을 부활시켰는데, 이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병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후 징세인들을 색출하며 도시를 장악했다. 이 봉기는 결국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부르고뉴 공작은 이후 6년 동안 프랑스를 지배하였다.
잉글랜드가 재정적 어려움에 허덕이는 사이, 부르고뉴 공작은 플랑드르로 진출하였다. 1379년 이후 플랑드르 지역에선 부르고뉴 공작의 장인인 루이 드 말(Louis II de Flandre) 백작이 헨트의 직물 업자들과 싸우고 있었으나 결국 1382년에 패배하였고 이 지역은 친잉글랜드 인사인 필립 판아르테펠더가 장악하였다.
루이 백작은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에게, 판아르테펠더는 잉글랜드에 각각 도움을 요청하였다. 리처드 국왕은 판아르테펠더를 응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갈 채비를 하였으나 평민원에서 자금 지원을 거절하였다. 반면 프랑스군이 플랑드르로 진출하여 이 지역을 제압하였고 루이 백작이 죽은 후 결국 부르고뉴의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백작이 되었다.
플랑드르 지역의 영향력 상실로 이제 잉글랜드는 경제 봉쇄에 더하여 양모 무역의 차질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잉글랜드는 계속된 실책을 저질렀는데, 하나는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던 (친프랑스계)블루아 가의 공위 요구자를 석방함으로써 브르타뉴에 있는 친잉글랜드 세력을 실망시킨 것과 카스티야 왕위를 얻으러 원정을 떠나는 곤트의 존을 붙잡지 않은 것이다.
플랑드르와 브르타뉴의 맹방을 잃고 곤트의 존마저 없는 잉글랜드는 이제 이번 세기 최대의 침공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동안 잉글랜드가 저지른 파괴와 만행에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모인 3만의 병력이 슬라위스 주변에 집결해 있었다. 혼란한 와중에 잉글랜드의 국왕 자문회의는 나름대로의 방어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왕립선들을 템스강에 숨겨 대기하고 있다가 적군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왔을 때 적 함대를 공격하여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병상에 누으면서 가을로 연기되었고, 가을에는 다시 해협의 기상 악화로 출항하지 못하였다. 결국 1386년 11월 프랑스는 침공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인들이 잉글랜드인을 증오하는 것처럼 잉글랜드인들도 프랑스인들에 대한 증오심과 경멸감을 키워나갔고 이러한 외부 세력에 대한 적대감은 지역적 충성심을 넘어섰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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