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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4)

by The Raven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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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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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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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4)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5)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1)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2)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3)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베드퍼드는 새로운 군대를 위한 전비를 의회에 요구했으나 의회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제 전쟁은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급 젠트리와 미천한 출신들이 많았던 지난 세기와 달리 15세기에는 귀족 출신의 고위 지휘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이 전쟁에 적극 참여한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많은 영지가 흉작으로 인해 수입이 이전만 못했기 때문이다. 


1427년 3월 베드퍼드 섭정은 웨일스 변경 지대 출신의 한 남자를 대동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백년전쟁에서 가장 가공할 용사 중 한 명은 톨벗 경(John Talbot, 1st Earl of Shrewsbury)이었다. 

톨벗 경

 두 사람은 새로운 공성 포대를 구하였으나 겨우 중기병 300명과 궁수 900명을 데리고 왔다.
섭정이 프랑스를 떠나 있는 동안, 도팽파가 브르타뉴 공작의 변절을 이용하지 않은 것은 잉글랜드로서는 행운이었다. 1426년 브르타뉴 공작 장은 소뮈르에서 도팽과 조약을 체결했고, 그의 동생은 잉글랜드의 중요 요새인 퐁토르송을 점령하였다.


베드퍼드도 대응에 나서 5월에 워릭 백작이 퐁토르송을 탈환하자 장은 다시 잉글랜드쪽으로 돌아서서 트루아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1427년 말 베드퍼드는 삼국동맹을 완전히 회복시켰다.


도팽파에 대한 대공세를 시작하기 전, 잉글랜드군은 먼저 도팽파의 여러 근거지를 접수할 필요가 있었다. 몽타르지(Montargis)가 그 중 하나였는데, 이 곳은 루앙강과 베르니송강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 주민으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라파유 영주가 지키고 있었다. 


워릭 경은 5,000의 병력과 공성 포대를 가지고 7월 15에 도시를 조직적으로 포격하였으나 6주가 지나도록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도팽파 내에 자신을 기습할 지휘관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바스타르 도를레앙(Bastard d'Orléans)은 1407년에 살해된 오를레앙 공작의 혼외자로 보제와 베르뇌유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직업군인이다. 크라방 전투를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그는 도시로 전령을 보내 합동작전을 계획했다. 


바스타르의 병사들이 도시 남쪽 길목을 지키고 있던 잉글랜드군의 눈 앞에 나타나자 워릭의 병사들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도시 주민들이 운하의 수문을 열자 밀려 들어온 강물이 잉글랜드군을 덮쳐 수많은 이들을 익사시키고 잉글랜드군을 둘로 나누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도시를 방어하던 병사들이 출격하여 결국 워릭은 병사 1,000명을 읽고 공성 포대도 버린 채 달아나야 했다. 

몽타르지 전투(Siege de Montargis) 삽화

잉글랜드군이 몽타르지에서 패주하던 날 존 파스톨프 경도 멘의 앙브리에르에서 패배했고 멘 지역 전체에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섭정은 이번에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즉시 몽타르지에 대한 포위전을 재개하였고, 멘의 봉기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또한 톨벗 경으로 하여금 르망을 탈환하게 하고, 멘으로 가는 핵심 요충지 중 하나인 라발을 손에 넣었다. 1428년 봄이 되자 오랫동안 희망해온 새로운 전역의 길이 열렸다. 


1427년 7월부터 1428년 6월까지 잉글랜드군은 새로운 공세에 필요한 자금 및 병력 준비를 위해 보냈다. 섭정은 솔즈베리 백작을 본국에 보내 전쟁 자금을 요청했다. 솔즈베리는 2만 4,000파운드와 중기병 450명, 궁수 2,250명, 10명의 공병, 70명이 넘는 무기 제조자 및 공성 포대를 싣고 샌드위치항에서 출항하였다.


새로운 전역의 목표에 대해 섭정과 솔즈베리는 의견이 달랐는데, 솔즈베리는 루아르강으로 가는 요충지인 오를레앙의 정복을 원했고 섭정은 앙주 지역을 지배할 수 있고 기옌과 북부 영토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앙제르를 원했다.


섭정은 오를레앙을 공격하는 것이 켕겼다. 오를레앙을 공격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었고, 오를레앙 공작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있었기 때문에 오를레앙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도의 모든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비록 솔즈베리의 의견이 관철되었지만, 섭정은 오를레앙 포위전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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