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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1)

by The Raven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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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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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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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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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1)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2)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3)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4)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5)

헨리 5세가 세상을 떠난 후 6주 만에 샤를 6세도 사망함으로써 잉글랜드의 헨리 6세이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가 된 아기 국왕은 나머지 프랑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 

이 이중 왕국은 뜻밖에도 순조롭게 굴러갔는데 거기에는 헨리 6세의 섭정인 드퍼드와 그의 위대한 장군 솔즈베리 백작 덕분이었다. 

몬머스의 존, 베드퍼드 공작(John of Monmouth, Duke of Bedford)

1422년 베드퍼드 공작 몬머스의 존은 서른세 살이었다. 형 헨리 5세가 해외에서 싸우는 동안 잉글랜드의 호국경(Guardian of England)를 두 번이나 지낸 그는 성미는 불 같았지만 헨리 5세보다 인간적이었고 서글서글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행정가, 외교가였으며 (어린 조카를 내치고 왕위에 오른 다른 역사 속 인물들과는 다르게) 조카 헨리 6세에게 헌신적으로 충성을 바쳤다. 

그는 형의 유지에 따라 부르고뉴 공작에게 섭정직을 제안했고, 필리프가 이를 사양하자 크게 안도했다.

솔즈베리 백작(Earl of Salisbury)이 페르슈 백작(Count of Perche)인 토머스 몬터규(Thomas Montagu)는 백년전쟁 시기 헨리 5세 다음으로 잉글랜드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헨리 5세가 총애했던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이면서 실제 전투에서도 훌륭한 전천후 군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베드퍼드와 손발이 잘 맞았다. 

토마스 몬터규와 아내(좌)와 그의 문장(우)

베드퍼드, 솔즈베리와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세 번째 잉글랜드 인은 바로 워릭 백작(Earl of Warwick)이 오말 백작인 리처드 비첨(Richard Beauchamp)이다. 다만, 더할 나위없이 유능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복무했음에도 이룬 게 별로 없었다. 

워릭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그가 잉글랜드 지휘관 중에서는 (군주를 제외하고) 실물과 그럴듯하게 닮은 초상을 남겼다는 점이다. 

헨리 6세를 안고 있는 워릭 백작(좌)과 그의 조상(우) - 출처: 워키백

겨우 스무 살 때 오와인 글린두르(Owain Glyn Dŵr)와 싸워 그를 패주시킨 워릭은 1415년 아르플뢰르 포위전에 참가한 바 있으며 뒤이은 노르망디 정복과 트루아 조약으로 이어진 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세기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군인이었던 그는 헨리 6세의 개인 지도 교사로 임명되는 명예도 누렸으며 훗날 잔 다르크를 사형시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솔즈베리와 워릭은 구성원 대부분이 20년 넘게 함께 해온 대단히 재능있는 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전투와 습격, 산발적인 교전에 능했고 전역 기간이 아닐 때에도 막사와 안장, 요새가 일상인 삶을 잘 이끌었다.

앙리 국왕(헨리 6세)은 마침내 섬처럼 고립된 일부 도팽 세력 지역을 제외하고 루아르 강 북쪽의 프랑스 전역에서 국왕으로 인정되었다. 이 지역의 상당 부분은 부르고뉴 공작의 지배를 받았고, 브르타뉴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가 다스리는 독립된 지역이었다.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최대 범위는 노르망디와 파리, 일드프랑스, 샹파튜와 피카르디의 일부, 여기에 파드칼레와 기옌을 아울렀다. 앵글로-프랑스 왕국은 잉글랜드와 완전히 분리되어 유지되었고, 소수의 잉글랜드 관리들의 감독을 받는 프랑스인들에 의해 오래된 제도에 근거하여 통치되었다. 

노르망디는 루앙에 있는 자문회의를 통해 별개의 국가로 운영되었는데, 베드퍼드 섭정이 노르망디 공국을 랭커스터가의 보루로 탈바꿈시키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베드퍼드는 교역을 장려하고 캉에 대학을 설립하는 한편, 헨리 6세의 이름으로 고품질의 주화(살뤼 금화)를 발행하여 현지 노르망디 인들의 인기를 얻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파리는 상황이 조금 달랐는데, 파리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자리 잡기 전에 이미 도팽의 지지자들이 숙청된 상태여서 잉글랜드와 협력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베드퍼드는 잉글랜드 왕가에 대한 인기를 생각하면서도 프랑스 신민들이 전쟁 수행에 노력을 기하도록 강요하여 파리 뿐만아니라 노르망디인들로 혹독한 과세를 견뎌야 했다. 프랑스 농민들은 세금외에도 잉글랜드 수비대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는데, 이들은 식량 징발, 약탈, 몸값을 뜯어내기 위한 납치, 파티스(보호비) 갈취에 시달려야 했다.

베드퍼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통치하는 프랑스 지역은 잉글랜드 수비대와 탈영자들, 약탈꾼들과 도팽파 습격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고 1420년대 말이 되자 노르망디에서 오는 세수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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