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 1 2
*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 1 2 3
*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 1 2 3 4
*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 1 2
*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 1
*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오를레앙의 마녀 - 1429~1435) - 1 2 3
파리에서의 흉흉한 민심을 반전시키기 위해 베드퍼드 섭정은 아홉 살의 앙리 2세(헨리 6세)를 프랑스로 모셔 대관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앙리 2세는 12월 2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에 도착하여 환희의 입성(joyeuse entrée)을 했다.
파리 시민들은 국왕을 떠들썩하게 맞이하였고, 12월 16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보퍼트 추기경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하지만, 보퍼트 추기경의 서툰 진행으로 행사는 엉망이 되었고, 대관식 연회는 폭동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대관식은 대중의 인기를 안겨주는 대신 파리 시민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섭정은 잉글랜드인으로서는 드물게 진심으로 프랑스인들에게 애정을 보인 사람이었지만, 1432년 잉글랜드의 입지는 현저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1432년 2월 3일, 120명의 도팽파 병력이 내부 배신자가 내려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라 루앙 성채의 그로스 투르 요새를 점령하는가 하면, 3월 종려주일 전야에는 일부 도팽파들이 보급 수레에 숨어 샤르트르로 들어와 시가전 끝에 도시를 함락하였다.
5월, 섭정은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마른강을 굽어보이는 라니를 포위했다. 도시는 두 면이 마른강으로 보호되는 등 강력하게 방비되어 있었기네 섭정은 강을 봉쇄했다. 8월 9일, 바스타르 도를레앙과 카스티야 용병 로드리고 데 비얀드란도가 이끄는 구원군이 도착했다.
8월 10일 구원군은 라니로 진입을 시도했고 섭정의 군대가 이를 저지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전세를 호각을 보였지만, 결국 섭정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무더운 날씨에 전투가 8시간 동안 지속되면서 여러 병사들이 열사병으로 사망한데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중기병들이 탈진했기 때문이다.
섭정은 300명의 병사만 잃었으나 갑작스런 날씨 변화로 마른강이 범람하고 바스타르가 파리로 진군할 것처럼 움직이자 베드퍼드는 결국 8월 13일 봉쇄를 풀었다.
1432년 11월 14일, 섭정의 아내 부르고뉴의 안느가 사망하였다. 안느는 섭정과 부르고뉴를 이어주었던 가교였던만큼 베드퍼드는 부르고뉴의 또 다른 강력한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싶어했을 것이다. 결국 섭정은 이듬해 룩셈부르크의 자케타와 재혼하였고 필리프는 이 결혼이 자신의 동의없이 성사된 것에 대노하였다.
1433년 6월 섭정은 자신이 무능하고 태만하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잉글랜드에서의 내부 단속을 마친 후, 전쟁에 필요한 신규 자금 조달을 위해 그는 왕실 재정을 면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 시기 전쟁은 에드워드 3세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했다. 갑옷과 무기는 갈수록 정교해졌고, 대포는 이제 포위전의 필수품이 되었다. 반면, 급여를 줄 돈만 있으면 병사를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434년 전역은 애런들 백작이 루아르강 유역의 앙주와 멘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 잉글랜드에 유리하게 시작되었다. 포로 교환을 통해 풀려난 톨벗 경은 은기소르, 주아니, 보몽, 크레이, 클레르몽, 생발레리를 획득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스케일스 경과 윌러비 경은 몽생비셸의 함락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베드퍼드는 파리 시장으로부터 급히 돌아와 달라는 서신을 받았다. 1434년 7월, 잉글랜드 출신의 전시 약탈자로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노르망디 농민들이 잉글랜드 수비대에 맞서 봉기하였다.
주동자는 생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8월에 다른 마을에서 비슷한 학살 사건이 일어났고 다시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이 봉기도 가까스로 진압되었지만, 이중왕국의 심장부에서의 봉기는 섭정에게 쓰라린 타격이었을 것이다.
1432년 12월, 그 어느 때보다도 엄혹한 겨울이 찾아온 때에 섭정은 파리로 돌아왔다. 포도나무와 과일나무는 얼어 죽었고, 포도주와 밀가루를 비롯한 모든 식량이 몹시 귀했다. 주인이 떠난 빈 집은 허물어 장작으로 쓰였다. 1435년 2월 섭정은 마지막으로 파리를 떠났다.
이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배신자로 비춰지지 않기 위해 법률가들을 동원해 트루아 조약에서 법적인 트집거리를 찾아냈다. 1435년 2월 부르고뉴의 필리프는 부르봉 공작과 다른 도팽파 인사들을 네베르에서 만났고,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부르고뉴파와 도팽파, 그리고 잉글랜드 사이에 일반 협정을 맺기 위한 회담을 아라스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8월에 아라스에서 회담이 시작되었고, 루앙에서 중병을 앓고 있던 섭정은 영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양도할 각오를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왕위에 대한 조카의 권리에 관해서는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6주 간의 논쟁이 있었지만, 아무런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잉글랜드 대표단은 아라스를 떠났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435년 9월 14일 베드퍼드 공작 존이 루앙에서 사망하였다.
"태생과 인품이 고귀한 자. 현명하고, 관대하고, 경외와 사랑을 받았다." 파리 부르주아는 그에게 이런 비문을 남겼다. 의심의 여지없이 뛰어난 정치가이지 군인이었던 섭정은 그가 사랑했던 루앙시 노트르담 성당 성단소 안에 묻혔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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