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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by The Raven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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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흑태자는 어떻게든 전투를 피하고 싶었지만, 남쪽으로의 퇴로는 미오송 강으로 막혀있었고, 강을 무리하려 건너려 했다가는 적의 습격을 받아 전멸될 위험이 있었다. 

결국 그는 유능한 베테랑 존 챈도스 경의 조언에 따라 자신이 본진을 지휘하면서 챈도스 경에게는 측면을 맡겼다.  그리고 다른 부대는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이 맡았다. 

존 챈도스 경

각 분대는 말에서 내린 약 1,200명의 중기병과 그보다 적은 수의 궁수, 가스코뉴 창기병, 약간의 단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방은 길고 튼튼한 산울타리와 도랑으로 보호되고 있었고, 좌측은 울창한 숲으로, 후위와 우측은 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장 국왕은 이튿날 새벽에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으나 그날은 주일이었고 교황의 특사 페리코르 추기경은 국왕을 설득하여 협상을 시도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추기경은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양 진영을 오가며 협상을 진행하였다. 흑태자는 거액의 돈과 함께 슈보시를 통해 얻은 도시와 성, 포로들을 돌려주고 7년간 프랑스 국왕에 맞서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장은 흑태자의 무조건적인 항복과 100명의 잉글랜드 기사를 내놓으라는 요구 말고는 아무런 조건도 수락하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 사이 잉글랜드 병사들은 궁수 주변으로 도랑을 파고 산울타리를 세우는 등 방어 시설을 정비하며 주일을 보냈다. 이렇게 방어 시설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이왕이면 흑태자는 전투를 피하고 보르도로 빠져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푸아티에 전투의 전장도 (출처: https://warfarehistorynetwork.com/)

이튿날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가 있다. 

이튿날 아침 솔즈베리 휘하의 후위 부대가 엄호하는 가운데 잉글랜드 병사들이 몰래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시점에 프랑스 군은 질서 있게 배치되지 못한 상태였다. 장 국왕은 말 탄 기사 네 명이 나란히 통과할 수 있는 산울타리의 한 틈새로 300명의 중기병 전위 부대를 돌격시켜 본 전투에 앞서 잉글랜드 궁수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뒤는 독일 용병들과 보병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대형(battle)이 뒤따를 것이었다. 그다음 도팽(프랑스의 왕세자) 휘하의 두 번째 분대(4,000명)와 오를레앙 공작이 이끄는 세 번째 분대(3,000명), 그리고 장 국왕이 이끄는 네 번째 분대(6,000명)가 올 예정이었다. 

뒤의 세 분대의 중기병들은 모두 중장갑 차림으로 걸어서 전진할 예정이었는데, 이는 윌리엄 더글러스라는 스코틀랜드 출신 기사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오전 열 시경 장 국왕은 잉글랜드 군이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부대의 대형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클레르몽 원수(Marshal de Clermont)와 도드레앙 원수(Marshal de d'Audrehem) 휘하의 정예 기사 300명에게 잉글랜드 진영 전방의 산울타리를 향해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산울타리 뒤에서 자리 잡고 있던 궁수들은 두 원수가 이끄는 중기병을 향해 끊임없이 화살을 날렸다. 빗발치는 화살에 말과 기사들은 쓰러졌고, 화살에 겁을 먹은 말들이 뒷발로 서면서 기사들을 바닥에 나뒹굴었다. 울타리 뒤에 은신하고 있던 솔즈베리의 기사들은 바닥에 쓰러진 프랑스 기사들을 죽였다. 

클레르몽은 전사하였고, 도드레앙은 포로로 붙잡혔다. 윌리엄 더글러스는 가까스로 달아났다. 뒤늦게 프랑스 중기병들을 따라 산울타리에 도달한 독일 용병들과 보병들은 험한 지형으로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였고 잉글랜드 병사들은 가까스로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때 즈음 상황을 파악한 흑태자가 솔즈베리를 구원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 중무장 병사들의 보호를 받은 궁수들은 산울타리에서 나와 습지에 서서 적의 측면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고 독일 용병들은 마침내 밀려났다. 

15세기 프랑스 화가 Loyset Liédet이 묘사한 푸아티에 전투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그러나 프랑스의 주력 중기병 1만 3,000명은 건재한 상태였다. 프랑스 진영의 세 분대 중 도팽이 이끄는 첫 번째 분대가 관목과 가시덤불을 헤치고 경사면을 힘겹게 올라 산울타리로 전진하였다. 프랑스 병사들이 워낙 거칠게 공격해왔기에 흑태자는 예비 병력(정예 중기병 400명)을 제외한 모든 자원을 산울타리 방어에 쏟아부어야 했다. 

마침내 도팽의 병사들이 비틀거리며 퇴각했지만, 잉글랜드 진영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멀리 치워졌고 무기가 부러진 병사들은 시신에서 창과 검을, 궁수들은 적군의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 회수했다. 잉글랜드 군은 예비 병력을 제외하고는 다치지 않거나 격전으로 지지치 않은 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잉글랜드 군은 장 국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의 분대가 공격 태세를 갖춘 것을 보았다. 잉글랜드 군으로서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를레앙 공작의 분대는 돌연 도팽의 군사와 함께 전장을 떠났다. 오를레앙이 만약 전투를 피하지 않고 잉글랜드 군과 싸웠다면 비록 잉글랜드 군이 오를레앙 군을 격퇴하더라도 장 국왕이 이끄는 프랑스의 마지막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장 국왕이 이끄는 원기 왕성한 6,000명의 군사가 산울타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자 이미 기진맥진한 잉글랜드 병사들은 이 마지막 공격을 막아낼 힘이 있을까 의심하였다. 흑태자 옆에 있던 경험 많은 기사들조차 절망 섞인 소리를 내자 흑태자는 격노하며 기사와 병사들을 다그쳤다. 

결사적이었기에 더 맹렬해진 잉글랜드 궁수들은 어느 때보다 활을 잘 쏘았으나 프랑스 병사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냈다. 흑태자는 마지막 예비 병력을 투입하며 챈도스에게 돌격을 지시하고 본인도 장 국왕을 향해 돌진하였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Eugène Delacroix가 묘사한 푸아티에 전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제 양 군 사이의 처절한 마지막 혈투가 벌어졌다. 화살이 떨어진 궁수들도 검과 도끼를 빼들고 산울타리에서 나와 중기병들을 도왔다. 양 측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무기와 투구가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는 푸아티에에서 1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성 조지의 깃발이 프랑스 군 후위에서 나타났다. 사실 흑태자는 전투가 일어나기 앞서 카프탈 드 뷔슈(카프탈은 '대장',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중세 가스코뉴 지방의 호칭 또는 작위이다. 당시, 뷔슈의 카프탈은 그라이의 장 3세였다.)에게 60명의 중기병과 100명의 궁수를 주어 골짜기를 통과하여 프랑스 군의 후위를 치도록 하였다. 

카프탈의 병력은 많지 않았지만, 프랑스 군로서는 카프탈의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었고, 이에 프랑스 진영이 흔들리자 흑태자는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다. 프랑스 병사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흑태자는 장 국왕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프랑스 군 역시 맹렬히 저항하면서 전장을 떠나고 있었다.

오후 세 시경, 장 국왕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열네 살 아들 필리프와 함께 전장에 남아 홀로 싸우고 있었다. 이미 엄청난 수의 잉글랜드 병사들이 국왕을 알아보고 막대한 몸값을 받아내고자 그를 에워쌌다. 이들은 국왕을 차지하려 서로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위릭 백작과 코범 경이 국왕과 그의 어린 아들을 구조하여 흑태자 앞으로 끌고갔다. 

챈도스 경이 전투가 끝났음을 왕세자에게 알리자, 흑태자는 무구를 벗고 붉은 천막을 세워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에도 프랑스 군에 대한 추격은 계속 이어져 푸아티에 성문에까지 이르렀다. 성 앞에서 많은 수의 말과 사람들이 칼에 베이고 쓰러졌으나 푸아티에 성 안의 사람들은 성문을 걸어 잠근 탓에 성문 앞에선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이 날 전투로 대귀족을 포함해 2,500명의 프랑스 중기병이 스러졌다고 한다.

또한 많은 프랑스인들이 생포되었는데, 여기에는 귀족 및 백작 열 일곱 명도 있었다. 일반 병사들도 일당 4~5명 또는 여섯 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을 감시하는 게 어려워 일부는 나중에 몸값을 가지고 보르도로 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풀어주기까지 했다. 포로들의 몸값과 약탈로 잉글랜드 군은 모두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매우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다. 뛰어난 참모인 존 챈도스 경이 있었다 하더라도 오를레앙이 포기하기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면 잉글랜드의 방어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흑태자는 장 국왕을 위로하면서 극진히 대접하였고, 그와 그의 아들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1357년 5월 24일 포로 신분의 프랑스 국왕과 왕세자는 런던에 입성했고, 장은 사보이 궁전을 거처로 배정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육촌인 장 국왕을 마음에 들어 하여 윈저성을 데려왔고 그곳에 장 국왕은 사냥을 즐기며 지냈다. 

한편, 국왕이 사로잡히고 중앙정부가 붕괴한 프랑스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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