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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백년전쟁

백년전쟁 1337~1453 (비보 - 1435~1450 1)

by The Raven 202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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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9월 20일, 베드퍼드 섭정이 죽은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샤를 7세와 부르고뉴의 필리프는 아라스 조약(Congress of Arras)을 체결하였다.

필리프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이미 그가 점령하고 있었던 마콩, 오세르, 퐁티외와 솜강 유역 지대를 왕령지로 받았다.

아라스 조약을 묘사한 삽화 (1484년 작, 작가 미상)


후에 아라스 조약은 부르고뉴파에게 끔찍한 실수로 판명되었고, 이는 이중 왕국 뿐만 아니라 부르고뉴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샤를 7세는 필리프를 미워했었고, 필리프에서 잉글랜드를 버리라고 조언했던 니콜라 롤랭과 앙투안 드 크루아는 샤를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필리프 공작의 배신에 잉글랜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보퍼트 주교는 이런 불리한 여건속에서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평민원은 주전파를 이끄는 글로스터 공작을 지지했다. 헨리 4세의 아들이자 헨리 5세의 형제이며 헨리 6세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의 입지는 베드퍼드의 죽음으로 더욱 강해졌다.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


그러나 헨리 6세는 보퍼트 가문의 손아귀에 꽉 잡혀 있어 글로스터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정부 정책에 큰 영향력을 끼치진 못했다. 심신이 허약하고 온화한 성격의 헨리 6세는 중세 시대 국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차라리 수도사로 지냈으면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1435년에서 1450년까지는 프랑스내 잉글랜드 세력이 승산없는 전쟁을 질질 끌었던 시기이다.

1436년 2월 프랑스의 총사령광 리슈몽과 바스타르 도를레앙, 릴아당 원수는 5,000의 병력을 가지고 잉글랜드가 점령하고 있던 파리를 봉쇄하였다. 파리는 윌러비 경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 수비대는 부활절에 300명이 이탈하면서 전력이 약해져 있었고, 도시 민병대는 성벽 수비를 거부했다. 


결국 기아에 허덕이던 파리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바스타르를 사다리를 통해 성벽 안으로 끌어드렸다. 바스타르와 함께 성 내부로 들어온 선발대에 의해 성문이 열렸고 성은 함락되었다. 

1436년 7월에 부르고뉴 병사들은 칼레 포위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칼레를 제대로 봉쇄하지 못했고 8월 2일 글로스터의 험프리가 구원군을 이끌고 칼레로 들어왔다. 많은 플랑드르 도시들이 필리프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필리프는 1438년까지 연이은 반란을 진압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비록 잉글랜드에는 베드퍼드와 솔즈베리는 없었지만, 톨벗 경은 건재했다. 1436년 2월 새로운 대리 사령관인 요크 공작이 톨벗과 합류했다. 당시 스물네 살의 요크 공작은 우유부단하고 실력은 형편없는 군인이었지만, 글로스터의 동지이자 열렬한 주전파였고 톨벗과 잘 협력하고 곧 노르망디와 멘에서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1436년 말 톨벗과 토머스 키리얼 경은 400명의 기마병을 데리고 리(Ris)에서 포통 드 쟁트라유와 라이르의 1,000명의 병사들을 무찔렀다. 1437년 1월에 톨벗은 슈르즈베리 백작과 함께 이브리를 손에 넣었다. 

1437년 봄, 요크 공작을 대신하여 워릭 백작이 대리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예순의 고령이었지만 톨벗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던 워릭 백작은 톨벗에서 5,000의 군사를 주어 부르고뉴 군대에 포위된 솜강 유역 북쪽의 르크로투아를 구원하도록 했다. 르크로투아를 구원한 톨벗은 탕카르빌도 회복하였다.

1438년 프랑스군은 근 20년 만에 기옌을 공격했고 그와 동시에 카스티야의 로드리고 데 비얀드란도와 그의 군대는 기옌 지방의 농촌을 참혹하게 유린했다. 이 지역은 이듬해 헌팅던 백작이 모두 재탈환하였다. 

양측은 화평을 시도하여 1439년 7월 칼레와 그라블린 사이에서 회담이 열렸으나 잉글랜드는 여전히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지위를 놓고 타협하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됐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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