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 1 2
*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 1 2 3
*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 1 2 3 4
*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 1 2
*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 1
*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오를레앙의 마녀 - 1429~1435) - 1 2 3 4
* 백년전쟁 1337~1453 (비보 - 1435~1450) - 1 2
헨리 6세가 멘을 넘겨주기 위해서는 글로스터와 요크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서퍽은 글로스터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풍문을 유포한 뒤 1447년 2월 18일에 글로스터를 체포하였다. 또한 요크는 프랑스에서 소환되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일랜드로 보내졌다.
요크의 후임으로 서머싯 공작이 루앙에 부임하였고, 1448년 3월 16일, 르망과 멘의 요새들은 프랑스로 할양되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휴전은 1450년 4월까지 연장되었다.
이 시기에도 잉글랜드인들은 노르망디가 영원히 잉글랜드의 수중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노르망디 공국에 거주하는 잉글랜드인은 생각보다 적었고, 잉글랜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적은 수의 노르망디 수비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비해 재정 사정이 열악했으며 왕가의 부채는 매년 늘어나 거의 40만 파운드에 달했다. 반면, 프랑스는 부유한 상인이자 징세 담당관인 자크 쾨르를 아르장티에(argentier, 왕실 재무장관)로 임명하여 재정을 확충하고 이를 상비군 모집과 같은 군사 개혁에 지출하였다.
1445년 프랑스는 열 다섯개의 새로운 부대를 창설했는데 각각의 부대는 백 개의 '랜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나의 랜스는 총원 여섯 명(중기병 한 명, 궁수 두 명, 무장 예비 병력 세 명)으로 편제되었다. 1446년이 되면 샤를 국왕은 이러한 부대를 스무 개나 보유하게 된다. 특히 이 군사개혁의 급진적인 부분은 이들은 전투가 없을 때에도 해산되지 않는 상비군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모종의 규율로 관리되었고, 농민들로부터 파티스를 뜯어내는 것을 막기 위해 매달 정기적으로 급여가 지급되었다. 1448년에는 8,000명의 자유 궁수(franc-archers)가 모집되었다. 이들도 전시에는 급여를 받았고, 평시에는 세금을 면제받았다. 프랑스군은 포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는데, 유능한 포술 장인 장 뷔로를 기용하여 대포의 현대화를 진행하였다.
1449년 잉글랜드는 아라곤 출신의 용병이자 가터 기사인 프랑수아드 쉬리엔에게 브르타뉴의 부유한 도시 푸제르를 접수하고 약탈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휴전이 깨진 것이다.
1449년 7월 31일, 샤를 7세는 3만 명의 군사를 노르망디로 보냈다. 허술하게 유지되던 잉글랜드의 거점들은 프랑스군에 차례로 함락되었다. 8월 중순에는 북쪽에 퐁토드메르, 퐁트레베크, 리지외가 프랑스에 떨어졌다. 10월 초가 되자 중앙의 베르뇌유, 망트 등이 함락되었고, 남쪽에서는 쿠탕스, 카랑탕, 생로, 발로뉴가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일부 지휘관들은 프랑스군에 최소한의 저항조차 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10월, 샤를과 바스타르 도를레앙(뒤누아 백작)이 루앙을 포위하였다. 루앙의 주민들은 1418년과 같은 포위전을 또 다시 겪을 생각이 없었고, 폭동을 일으키며 성문을 열었다. 1,200명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내성으로 후퇴했고 10월 22일 샤를은 참호를 파고 포대를 세워 내성 포위전을 개시하였다.
프랑스군의 포위에 놀란 서머싯 공작은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하였고, 12일 간의 협상 결과, 톨벗을 프랑스에 넘기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서머싯은 캉으로 퇴각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프랑스는 뷔로의 대포를 앞세우고 동시에 잉글랜드 수비대장에게 뇌물로 회유하는 방식으로 많은 도시를 함락하였다. 1450년 봄이 되었을 때 잉글랜드는 겨우 셰르부르 반도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다.
불시에 벌어진 프랑스의 노르망디 침공과 루앙의 상실은 잉글랜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잉글랜드는 가터 기사 토머스 키리얼을 필두로 1449년 10월부터 구원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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