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 전쟁103 [책] 위닝포인트 - 존 보글 편 누구나 살면서 곤경에 빠지곤 한다. 책 '위닝 포인트'의 저자는 역사에 남은 위대한 인물들과 직접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책에 담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위닝포인트, 즉 '이기는 방법'을 실수에서 찾았다고 입을 모은다. 어떤 분야, 어떤 직업에서든 모든 일이 실수없이 잘 굴러가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많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명인들 역시 과거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실수에서 얻은 교훈을 적용할 결정적 순간이 왔을 때 성공적인 결정을 내리며 세상에 등장했다. 존 보글 (John C. Bogle) 1960년대 말, 존 보글은 보수적인 투자 서비스를 제공하는 웰링턴 펀드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이사회는 보스턴의 손다이크, 도란, 페인 앤 루이스(Thomdike, .. 2022. 6. 18.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1) '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장 2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국왕 샤를 5세는 진정 프랑스의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앙상하고 좁은 얼굴의 샤를 5세는 몸이 지독하게 허약해서 궤양에 시달리고 병명을 .. 2022. 6. 13.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4) '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하고 국왕이 사로잡힌 프랑스는 대혼란에 빠졌다. 아직 현명왕으로서 재능을 드러내기 전인 열여덟 살의 젊은 왕세자 샤를에게는 이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바.. 2022. 6. 8.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3) '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흑태자는 어떻게든 전투를 피하고 싶었지만, 남쪽으로의 퇴로는 미오송 강으로 막혀있었고, 강을 무리하려 건너려 했다가는 적의 습격을 받아 전멸될 위험이 있었다. 결국 그는 유능한 베테랑 존 챈도스 경의 조언에 따라 자신이 본진을 지휘하면.. 2022. 6.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2)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1)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재무상 윌리엄 에딩턴을 통해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즈음, 잉글랜드는 나바르의 국왕 악인왕(Charles the Bad) 샤를 2세를 우군으로 맞이하였다. 그는 나바르 왕국의 군주이면서, 노르망디에 여러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 인근에도 부유한 영지를 가지고 있어 오히려 에드워드 3세보다도 프랑스 왕위를 자격이 충분.. 2022. 6. 2.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1350년대로 접어들면서 백년전쟁의 주인공은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에게로 넘어간다. 웨일즈의 왕자이자 '흑태자'로 유명한 우드스톡의 에드워드(Edward of Woodstock)는 영국사에서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며 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마음이 잘 맞는 아들이었다. 반면, 역대 프랑스 국왕 가운데 가장 멍청한 왕으로 불린 '장 르봉(Jean le Bon)'은 1319년 생으로 '선량왕 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350~1355년까.. 2022. 5. 2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5)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3)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에드워드가 칼레를 점령한 것은 단지 크레시-칼레 전역을 획득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칼레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물자가 드나드는 항구이자 교두보였다. 또한 잉글랜드의 더비 백작은 필리프 6세의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에 의해 에귀용에서 포위되어 있었으나, 크레시 전투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노르망디 백작은 포위를 풀고 루아르강 북부로 이동하였다. 한편 필리프가 칼레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브르타뉴에서 전해온 잉글랜드군의 또 다른 승전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1347년 토머스 대그워스 경이 블루아의 샤를.. 2022. 4. 30.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4)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1)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2)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3) 에드워드는 둔덕 위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서기들의 계곡(Valley of the Clerks)이 있었고, 전방과 우측에는 메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적군이 공격해올 전방은 경사진 초지로 이어져 궁수들이 활을 쏘기에 용이하였다. 그의 군대는 대략 2,000명의 중기병, 500명의 경창기병, 7,000명 정도의 궁수, 1,500명의 단검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료마다 수치를 각기 다르지만, 대략 1만 1,000명 정도인 셈이다. 잉글랜드 군은 병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에드워드 3세의 오른쪽에는 당시 16세였던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가.. 2022. 4. 15.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3) 에드워드와 함께 영국 해협을 넘어 노르망디로 향하는 잉글랜드 군대는 기사, 창기병, 궁수(기마 궁수와 보행 궁수) 및 단검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당시 잉글랜드 중기병은 금속 고리가 연결된 형태의 '미늘 갑옷'과 원뿔형 투구, 팔꿈치 보호대와 발 보호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필리프 6세의 기사들은 어깨와 팔다리를 철판으로 보호하고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얼굴 장갑이 개폐형으로 되어 있는 헬멧(bascinet)을 착용하였다. 프랑스 기사의 판금 갑옷에 비하면 잉글랜드 군의 장갑은 확실히 구식이었다. 중기병 운용에는 막대한 비용과 물자가 요구되었는데, 중기병 한 기를 운용하기 해서는 무장한 시종 두 명과 세 마리의 말(전투용 군마, 장비 운반용 말, 비전투 시 승용마)이 필요했다. 세 마리의 말을 운용할.. 2022. 4. 6.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2) 슬라위스 해전이 끝난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 3세는 충분한 전쟁 자금을 마련해주지 못한 정부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였고, 그 주범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스트랫퍼드를 지목하였다. 스트랫퍼드는 국왕의 분노를 사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교묘한 정치 수완을 발휘해 극적으로 국왕과 화해의 길을 마련한다. 에드워드 입장에서도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려면 국내 유력자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1341년 의회에서 승인한 특별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만성적인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럽의 여러 가문과 잉글랜드의 금융업자 집단이 에드워드에서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파산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341년 4월 브르타뉴의 공작 장 3세(Jean III)가.. 2022. 4. 5. 이전 1 ··· 7 8 9 10 1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