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백년전쟁 1337~1453 (암울한 싸움 - 1450~1453 1)

by The Raven 2024. 2. 26.

'백년전쟁 1337~1453' 이전 목록

* 백년전쟁 1337~1453 (전쟁의 서막) - 1  2 

* 백년전쟁 1337~1453 (크레시 전투)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 1  2  3 

* 백년전쟁 1337~1453 (현명왕 샤를) - 1  2  3  4 

* 백년전쟁 1337~1453 (잃어버린 평화) - 1  2 

* 백년전쟁 1337~1453 (잉글랜드의 기회 - 1399~1413) - 1 

* 백년전쟁 1337~1453 (헨리5세와 아쟁쿠르 전투 - 1413~1422)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 1422~1429) - 1  2  3  4  5 

* 백년전쟁 1337~1453 (오를레앙의 마녀 - 1429~1435) - 1  2  3  4

* 백년전쟁 1337~1453 (비보 - 1435~1450) - 1  2  3  4


1452~1453년에 진행된 톨벗의 기옌 원정은 이미 기진맥진한 잉글랜드로서는 최후의 시도였다.

이제 프랑스의 포가 잉글랜드의 화살보다 효과적이라는 점은 명확해졌지만, 잉글랜드 인들은 여전히 노르망디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잉글랜드 내에서는 노르망디 상실을 두고 서퍽과 그 정권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커졌다. 평민원은 서퍽 공작이 노르망디 영토를 프랑스에 팔아넘겼다고 비난하였다.

공작은 오를레앙 석방금의 횡령, 프랑스로의 군사 기밀 유출 등의 혐의로 고발되었다. 헨리 국왕은 그를 추방시킴으로서 공작을 구하려고 했지만, 그는 결국 칼레로 도주하는 중에 붙잡혀 참수당했다. 

노르망디 상실은 잉글랜드 내에서 군중 반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한때 노르망디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던 아일랜드인 잭 케이드는 존 파스톨프 경이 수비대를 감축시켰다는 이유(이는 사실이 아니다.)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1381년 와트 타일러가 주도한 농민 반란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잭 케이드의 반란

이 반란으로 왕실 재판소 감옥에 있던 죄수들은 풀려났고, 그 곳에 있던 재무대신 세이 앤드 실리 경은 참수되었다.

반란군은 결국 노르망디에서 돌아온 스케일스 경과 매튜 고프 경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고, 주모자은 케이드는 서식스까지 추격당한 끝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치안 유지의 임무를 부여받고 서머싯 공작이 칼레에서 소환되었다. 그 역시 노르망디 상실에 대한 책임으로 비난에 시달렸으나 다행히 마르그리트 왕비의 구명으로 권력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머싯 정권은 너무 불안정했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샤를 7세는 기옌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당시 기옌은 그 어느 때보다 잉글랜드로 많은 포도주를 수출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30년이 아닌 무려 300년동안 플랜테저넷가에 속해 있었고, 따라서 대체로 잉글랜드의 통치에 충성했다. 

샤를은 노르망디를 정복하자마자 투르에서 전략회의를 열어 곧장 기옌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푸아 백작과 팡티에브르 백작은 각자 프랑스군을 이끌고 바욘 주변의 도시, 베르주라크 및 바자를 함락시켰다.

프랑스의 기옌 진격에 대응해 잉글랜드인들은 리버스 경 휘하의 구원군을 모으려고 했지만, 구원군은 결국 출항하지 못했다.  

1451년 4월, 바스타르 도를레앙은 뷔로 장인과 함께 기옌을 침공했다. 이들은 보르도로 진군하여 주변 도시들은 신속하게 점령한 뒤 공국의 수도에 대한 포위전을 전개했다. 

카프탈 드 뷔슈이자 가터 기사인 가스통 드 푸아는 용감히 보르도를 방어했으나 결국 도시는 6월 30일에 항복하였다. 

1452년 9월 서머싯 공작은 기옌 수복을 위해 톨벗을 기옌의 국왕 대리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앞서 보르도에서 파견된 비밀 사절단은 서머싯 공작을 찾아와 공작이 군대를 파견해준다면 자신들도 봉기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노르망디 상실로 평민원의 비난을 받고 있던 서머싯에게는 기옌 수복이 땅에 떨어진 인기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프랑스에는 톨벗만큼 용맹한 기사는 없었지만, 그들에겐 장 뷔로가 있었다. 포술 전문가가 되기 전 장 뷔로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왔었고, 베드퍼드 공작 시절에는 샤틀레 법원에서 법관으로 일했다고 알려져 있다. 

샤를 7세로부터 파리 법정 재산 관리인으로 임명된 뷔로는 2년 뒤 재무대신으로 승진하였다. 뷔로의 포는 노르망디 전역이 벌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그 가치를 드러냈는데, 그는 꼼꼼하고 수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완벽주의자이자, 행정가, 그리고 창의적인 기술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포는 15세기 들어 엄청나게 발전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혁신은 1429년에 발명된 화약 제분기였다. 기존에는 전장에서 유황, 초석, 숯을 배합하여 사용해야 했다면, 신형 "알갱이" 화약 (안정 화약)은 원료를 따로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발사 속도를 획기적으로 증가시켰다.
게다가 값싸고 효과적은 수동 화기도 발전하였는데, '서펀타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들 화기는 철제 석궁의 절반 가격이었다. 비록 지나치게 거추장스러워 전장에는 많이 쓰이지 않았지만, 흉벽에 거치하면 포위전에서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 본 포스트는 책 '백년전쟁 1337~1453'를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반응형

댓글